<지옥>(연상호, 2021)
몇 해 전 작품을 봤다면, 몹시도 괴로울 뻔했다. ‘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과연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등의 질문에 사로잡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을 터다. 하지만 3년 동안 ‘설교 백신’을 맞으면서 신과 죄, 구원에 대한 질문이 싹 사라졌다. 목사라는 사람은 매주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예를 들어가며, 안 그러면 너희도 망한다며, 죄 고백을 강요했다.
나의 죄를 찾고자 무진장 노력했다. 괴로운 일이다. 땅에서 숨 쉬는 것조차 죄가 될 판이다. 같이 혼나는 이웃들이 불쌍했다. 세상을 망가뜨릴 힘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다 신의 대리자라 자부하는 그 자의 의도에 의심을 품었다. 사랑이 없었다. 높은 자리에서 떠드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었다. ‘예레미야’의 반도 안 지난 때, 4년을 더 죄인 소리 듣기 싫어 뛰쳐나왔다.
<지옥>은 단순하다. 신의 계시를 모두 다 보기에, 헷갈릴 필요도 없다. 신화의 세계의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계시를 받은 사람은 공포에 떨고,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으며, 잔인하게 죽어간다. 동일한 양상이 반복되고, 새진리회 사람들이 신의 의도가 선명하다고 할수록 작품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죄 물음(화살촉)의 방향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야 함을!
‘진리,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타인이 받은 죽음의 고지가, 자신들의 면죄부로 여긴다. 만약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그런 신의 의도를 안다면, 감싸줄 줄 알아야지. 죽음의 순간을 중계할 게 아니라, 그 옆에서 마지막까지 외롭게 하지 말아야지. 산 사람은 살아갈 수 있게 모르는 척, 그냥 스쳐지나가야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사람 조지지 말고.
집 밖 마당에서 오줌 쌀 때 있다. 그때마다 은동이(개)는 고개를 돌린다. 볼만하지 않아서 그런가, 신기해서 볼만도 한데, 먼 산 바라보기. 그 모습을 보며, ‘저 개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르는 척해주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남의 죄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개만도…. 신을 생각하면 따라올 건 죄(지옥) 아니고 사랑이다. 지옥을 지우다. 개들 따뜻한 물 주러 가야지.
신의 의도는 신이 안다.
인간은 신의 의도를 짐작할 뿐이다.
짐작으로 사람을 해할 수 없다.
사람을 해하는 것만큼 신의 의도와 먼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