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바람에 이리 살랑, 저리 살랑하는 벼를 보고 그렸다. 잔디를 툭 뽑아 바람에 날려보고, 옆에 있는 캐디에게 ‘앞바람? 뒷바람?’하는 나의 모습을….(베트남 캐디는 필드 위에서 쓰는 간단한 한국어 표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드라이버와 퍼터, 56도 웨지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Lucky 7’으로 처리하는 내게 앞뒤 바람이 무슨 문제인가.
바람의 방향과 세기와 상관없이 더디게 전진하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낭 해변으로부터 밀려드는 검은 구름이다.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여, 비를 잔뜩 뿌릴 것 같았다. 아침에 덥고, 점심에 구름이 끼며, 오후에 비가 오는 게 베트남 여름 날씨의 전형이라는 것을 이날 알았다. 아직 비가 오지 않지만, 바람이 세지고, 머지않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민폐 방지 모드 ON!
희한하게도, 전생에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닐까 할 정도로, 남에게 민폐 끼치길 싫어한다. 좋아하는 노래도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오늘은 내가 머리 올리는 날이고, 팀별 간격도 충분하며, 심지어 우리가 마지막 순서라는 정보가 두뇌 회로에서 사라지고, 남은 건 ‘빨리 치자!’ 하나였다. 두 친구와 세 캐디를 비에 홀딱 젖게 할 수 없으니까.
골프 스윙은 어드레스가 반이라는데, 반이고 나발이고 냅다 휘둘렀다. 성급하게 고개를 쳐들고 냅다 휘두르니, 제대로 맞을 리가 없다. 야구 선수의 롱 토스처럼 공이 쭉쭉 뻗어가야 하는데, 이건 무슨 축구 선수 드리블도 아니고…. 미안함과 민망한 마음에, 어차피 7번으로만 칠 거 캐디는 내버려 두고, 냅다 뛰어가 다음 공을 치고, 또 망치고, 비는 오고, 울화는 치밀고….
우산을 들고, 학처럼 그린을 누비던 김차장이 다가와 한 마디 했다. “천천히 해!” 사실, 내가 김사장, 김차장의 플레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 심호흡하고, 집에서 연습하던 몸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주문을 외웠다. ‘천천히, 천천히.’ 어느덧 마지막 홀, 노을 아래 날아가는 공을 보며, 비로소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베트남 말 배워갔어야 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은 내 인생 첫 캐디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