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레즈비언, 다 알겠는데 무성애자는 뭐야?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어느 정도 다양한 이슈를 접한 사람이라도 이 부분은 약간 생소할 수 있다. 오늘의 에세이 주제는 아직까지 페미니즘 분야에서 차지하는 기반이 적은 퀴어 페미니즘, 그 중에서도 ‘무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다.
남성중심적 사회 (가부장제), 이성애규범적 사회에 대해서는 이제 익숙하게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여전히 아직도 유성애규범적인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대할 때가 많은데, 쉽게 발화로 예시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명절날 친척들과 만난 상황)
- 얘,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니? 나이도 찼겠다, 빨리 시집 가야지.
(가부장적 시각, 정상가족 규범적 발화, 이성애 규범적 발화가 작동한 발화)
- 얘, 너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는 없니? 아무튼 누구를 만나야 해. 혼자면 외롭다.
(가부장적/정상가족/이성애 규범은 작동하지 않았으나 유성애규범적인 발화)
물론 여전히 후자의 경우도 우리 사회에서는 유니콘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뭐, 그런데 이렇게까지 모든 약자를 ‘챙겨야’ 하느냐고? 이것은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이런 인권 저런 인권 챙겨야지!”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이 그 동안 개인 차원에서의 불이익, 편견을 받고 살아왔다고 알고 있다가 이제는 어떠한 집단적 특성에 따라 받는 차별과 편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구조적인 혐오 기제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얘는 애가 다 괜찮은데 지금 솔로야~”
“빨리 좋은 여자/남자 만나서 짝을 찾아야 할텐데.”
“나이가 그 만큼 먹었는데 모쏠인건 그 만큼 하자가 있다는 뜻 아냐?”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오지랖 (및 그에 따른 지나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이라고들 한다. 사실 타인을 걱정하고 챙기고 하는 사람간의 ‘정(情)’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지랖이라는 것이 발동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기저에 바탕으로 한 어떤 규범적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 가족의 신화, 여성혐오 및 가부장적 신념, 이성애/유성애 규범적 사고방식 등이 기저에 깔려 있기에 오지랖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으면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며, 너도 빨리 이젠 좋은 사람 만나 연애/결혼 하라고 부추긴다. 유성애 및 유성애 수행을 모든 사람들의 기본값으로 두는 이 사회가 바로 유성애 규범적 사회다. 그리고 이 유성애 규범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성애 규범과 아주 밀착되어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에, 이 사회에서 무성애자들이 겪는 난색 및 고충은 성소수자 (LGBTQA+)들의 경험과 주로 가까운 곳에서 얽힌다.
지금껏 다양한 성소수자 친구들과 교류를 하며 지내 왔고, 무성애자 (혹은 무성애 스펙트럼, a.k.a 에이 엄브렐라) 친구들도 많이 만나왔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비헤테로-유성애자 퀴어인 친구들처럼 구조적으로 차별받는 어떤 부분이 뭐가 있지? 그냥 저런 말 다 무시하고, 애인 안 만나고 솔로로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저런 취급’이라는 것의 힘이, 나이를 먹어가면서의 그 ‘취급’의 무게가, 그리고 세상의 많은 ‘커플/부부/가족 혜택’ 부분 등에서의 ‘배제’라는 부분이, 동성애를 하는 성소수자들과 겹쳐 보이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며 고이 접어두게 되었던 것이다. 성소수자 안에서의 진짜 퀴어 가짜 퀴어를 나누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스/이성애/유성애 규범적인 가부장제 사회와의 투쟁을 위해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이 연대로써 ‘우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무튼 무성애자에 대한 주제를 꺼낸 것은 아직까지 이 사회에서 여전히 타자화되어 있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 무성애자에 대한 오해들을 다루기 위해서다.
가장 많이 들리는 그 오해 첫번째, "무성애자들은 성욕이 없다.” 성욕이 없으니까 무성애자 아닐까, 하는 이름에서 오는 뿌리깊은 오해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무성애자들은 성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적 끌림의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 이런 마음들을 이해하기에는 범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같은 단성애자(모노섹슈얼)들이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 물론 본인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떤 일종의 허용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한 가지 젠더 외에는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단성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본인이 끌리는 젠더 외의 젠더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생각해보면 비슷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본인이 이성애자라면 세상 구성원이 모두 동성으로만 이루어진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본인의 성욕은 여전히 있는 상태여도, 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 딱히 성적 끌림을 경험하지는 않는 그런 상태.
또한 무성애자들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두번째, “너는 연애를 하니 무성애자가 아니다.”가 있겠다. 하지만 무성애적 연애 관계도 있다. 무성애자끼리 만나는 ‘주키니(성적 끌림을 동반하지 않는 애인)’ 관계도 있고, 둘 다 무성애자가 아니더라도 무성애적 연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게다가 무성애자라고 모두 연정적 부분에서도 무성애자인 것이 아니라, 크게 스펙트럼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섬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로맨틱/섹슈얼 부분이 다른 무성애자들도 많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무성애자) 더라도 연애 관계 혹은 주키니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꼭 섹스를 해야 연애 관계가 아니듯, 성적 끌림이 없이도 연인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많이들 모르는 것 같다.
세번째, “스스로 무성애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나봐서 그런 것이다.” 가장 큰 혐오 발언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는 동성애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 (주로 청소년) 에게도 흔히 쓰이는 폭력적인 말이다. 이성애-유성애자들은 연애를 해보기도 전에 본인이 이성애-유성애자일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외의 젠더-성지향성은 꼭 겪어봐야만 확정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규범적 사고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물론 에이섹슈얼의 스펙트럼에는 ‘그레이섹슈얼’도 있다. 일평생 성적 끌림의 대상이 매우 한정적으로만 존재하고, 거의 느끼지 않는 정체성. 그러나 스스로 정체화를 내린 것이 아닌 이상, “에이, 너가 무슨 무성애자야. 그래도 나중에 혹시 모르니까 그레이섹슈얼로 정체화 해두는 게 좋지 않아?” 등의 폭력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성애 규범적, 정상사회 규범적 사회에서 짜증나 오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한편 그들까지 포함하여, 유성애 규범적 사회이기에 또 다른 측면으로 곤란해 온 사람들도 있다. 페미니즘 역시 인문학이기에 다른 측면의 관점들과 어떻게 결합하여 보느냐에 따라 그 약자성이 다르게 규범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인권은 <남성보다 평균 40% 낮은 연봉을 받기에> 낮은 상태라고 볼 수 있고, 노동권적 관점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이 3D 업종이며, 해당 업종에 대한 멸시나 취급 자체가 낮기에> 낮다고 볼 수 있듯이. 또한 군형법상 추행죄에 따르면 <항문성교 및 기타 추행>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인권침해를 받고 있다고 알 수 있듯이.
그러나 무엇 하나 오롯이 정답인 상태로 만드는 기준점이라는 것은 없다. 저 질문에 따르면 인권 줄세우기밖에 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들이 있는데 한 가지 잣대로 모두를 판단하려 하기 시작하면, 여성 성소수자는 군형법상 추행죄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 성소수자보다 인권이 높은 것인가?, MTF 트랜스젠더는 본인이 성별정정을 하기 전까지는 ‘시스여성보다 높은 임금을 받으니’ 더 인권이 높은 것인가? 하는 괴상한 질문들만 줄을 서게 된다.
그렇기에 “무성애자들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임금을 덜 받기를 해, 아니면 무성애자라고 (법적 규칙, 접근적 관점에서) 출입이 금지 당하기를 해?” 라는 질문을 하며 여전히 무성애자를 LGBTQA+ 성소수자 정체성으로부터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 인권운동의 본질과 지속가능성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할 대상은 저 '모든 것이 가리키고 있는 한 가지'다. 여전히 시스-이성애-유성애-가부장제는 이 사회의 기득권에서 똘똘 뭉친 채로 그 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배제된 우리끼리 “네 인권이 더 높네, 낮네, 너는 이런 취급 안 당하네, 나는 당하네” 하며 싸우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운동과 투쟁의 근본, 뿌리를 찾아야 한다. 소수자로서의 우리 모두는 연대로써만 힘을 더 크게 가질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