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신고를 할 일은 없는데요, 비혼주의는 아닙니다 (feat.혼인평권)
“미음씨도 벌써 나이가 서른이네. 결혼은 언제 할 계획이야?”
“아하하, 별로 생각이 없어요.”
“아~ 요즘 말한다는 그 비혼주의자? 그런건가?”
“아 뭐.. 네 뭐 비슷한 건데~ 예.. 맞아요~”
이제는 제법 대중들에게도 익숙해진 단어, 비혼(非婚). 비혼의 사전적 의미는 ‘결혼을 하지 않음, 또는 그런 사람.’ 이라고 나와 있다. 미혼(未婚)의 사전적 정의가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음, 또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확실히 비혼은 미혼의 대체어에 그치는 것이 아닌, 확장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혼은 현 상태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미래 지향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단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결심과 선언까지는 아니어도, 앞으로 결혼할 생각이 없으며 적어도 그런 본인의 의지(will)가 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20대 후반~30대 정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라면 매번 이와 같은 질문들에 시달리기 쉽지 않는가. 은근히 스트레스인 저런 질문, 매번 구체적으로 대답하기도 고충이고 (무엇보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 … 그래서 사실 저렇게 대충 대답하는 “네 뭐~ 맞아요~”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에 따라 대답은 굉장히 다양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비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만나는 사람이 법적 지정성별 동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하고 싶더라도 법적으로 허가를 받지 못하는 불가한 상태라고 해야 정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무례한 “언제 결혼해?” 하는 질문들마다 족족 ‘저 동성애자에요.’ 하고 커밍아웃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냥 대강 “예예~ 비혼입니다~” 하고 넘어 가는 것이지. 사실 심술이 나 있는 상태에서는 누군가 저런 저질 질문을 하면 “글쎄요, 대한민국이 혼인평권을 이룬 다음에야 결혼할 수 있겠죠?” 라고 대답하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다.
덧붙여, 물론 동성애자면서 동시에 비혼주의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냥 결혼을 하고 싶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비혼의 정의대로 치자면 이런 케이스들이 비혼이긴 하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짜증나기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비혼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그런 자기 혼자 재밌어하는 드립의 뉘앙스로 "너도 그 비혼주의자냐"고 묻는 것부터가 불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누구씨도 요즘 그 뭐 페미니즘~? 그런거 하는거야? 이런 질문과 굉장히 결을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애초에 결혼의 가능성이나 목표, 계획이 있는지 묻는 것부터가 이 나라에서는 굉장히 정치적이다. 결혼 및 출산 이후 대부분의 여성들이 커리어가 끊기고,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 여성 조차 ‘언젠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일에 소홀히 할 인력’으로 가정하여, 젠더간 임금 격차가 32.5% (OECD국 1위) 에 달하는 이 나라에서는 적어도 ‘결혼할거냐’는 질문이 이번 주말에 뭐 할 거냐는 식의 가벼운 질문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 당사자가 직접 계획을 얘기하기 전까지는 그런 거, 묻지 마시길.
(*폴리섹슈얼 : 다성애자. 성적 끌림을 느끼는 대상의 젠더 개수가 0개나 1개가 아닌 지향성. 흔히 바이섹슈얼, 팬섹슈얼 등이 여기 속한다.)
당연히 사람에 따라 이유는 모두 다르겠지만, 한 범성애자의 경우를 예시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은 페미니즘적인 사유로 남성과의 연애/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아, 이는 어떤 일종의 4B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를 뜻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표어.) 와 같은 보이콧이나, 행동강령, 규칙에 따르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그냥,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본인에게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여성인 애인이 할 때와 남성인 애인이 할 때 너무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스스로가 너무 자주 분노하게 되고 복잡한 생각에 잠기게 되는 일이 많단 걸 알게 되어 그런 것이다.
예컨대 상대방과 즐거운 데이트 후 집에 갈 때, 상대방이 아무 뜻 없이 “밤 길 조심히 가~” 라고 말했다. 그걸 말하는 화자가 여성일 땐 아무 생각 안 들지만, 남성일 경우엔 그 발화 자체가 기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밤 길 조심하라고? 내가 밤 길 범죄에서 가장 취약할 핵심 위험 요소는 남성 가해자로 인한 여성타겟 범죄가 가장 큰데? 남자인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또 다른 예시, 여성 애인이 내게 오늘 하루가 어땠다고 가벼운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그 아줌마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했는데? 헉~ 기분 나빴겠다.”라고 대답하겠지만, 남성 애인이 “아줌마” 운운하며 흉을 본다? 이미 그 맥락과 이 사람의 기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 의도도 아니란 것도 잘 알고, 남성 개개인을 가해자로 몰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저런 지극히 평범한 대화나 상황속에서도 불쑥 불쑥 찾아드는 지독한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아가 자꾸 고개를 들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그렇다고 여성 애인들이 모두 페미니스트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런 ‘가부장적이고 반페미적인’ 발화를 어떤 사람이 하느냐, 당사자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굉장히 결이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한 이후에도 범성애자들은 물론 남성에게도 끌림을 느끼겠지만, 연애라든가 깊은 차원의 대화를 교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까지 되기는 어려움을 느낀다. 적어도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의 기준에서라면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남자와 만날 일이 굉장히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성이 호감/성적 끌림의 대상이 아닌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로 평범한 연인의 모습으로 사랑에 집중하는 형태로 연애나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이런 사람들은 남성과의 비혼주의를 선언한다.
그렇지만 “너 결혼 안 할거야?”, “너 비혼주의자야?” 라는 질문에 여전히 ‘그렇다!’고 냉큼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 범성애자가 만나고 있는 지정성별 여성인 애인이 있다면 이 때는 비혼주의자가 아니라 ‘결혼을 원하지만 할 수 없는 불가적인 관계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고, 함께 반려인으로 살아가며 법적인 보호 안에서 가족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다. 애인처럼 가족처럼 그렇게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었으면 한다. 이 때는, 비혼주의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비혼주의냐는 질문을 들으면 대답이 굉장히 애매해질 수 밖에 없다. 아니, 대답은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불편한 대답 밖에 할 수가 없다.
나의 상태를 대답한다면,
“아주 만약 남자를 만난다면 비혼주의자가 맞는 말이겠지만, 여자를 만나는 저는 법적혼이 아직은 불가한 사회에 살고 있네요, 결론! 님이 생각하는 그 ‘결혼’은 제가 할일이 없는 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