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나 여자나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 뿐이라는 말
내가 페미니즘을 접하기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성차별을 바라봤었는지, 나의 예전 시절의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예컨대 “요즘은 다들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남혐’, ‘여혐’이 들끓는 혐오의 시대다”라고 말하거나, “남녀 모두 자기 역할을 다하며 사이좋게 지내던 과거와는 다르게 요즘은 ‘다들’ 억울해 하는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엄연한 여성혐오의 문제를 ‘남혐’, ‘여혐’ 등의 양립 갈등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이와 같은 시선이야말로 폭력적이며, 성평등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내 ‘양성평등 글짓기’ 에서 상을 탔던 기억이 난다. 우연한 기회로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이후 비교적 최근 해당 글을 다시 읽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나도 이렇게나 세상을 납작하게 이해하고 있었구나 싶어 너무도 놀라웠다.
“남녀 차별의 예를 몇 가지 들자면 우선 일부 초·중학교에서 출석번호를 아직도 남학생부터 매긴다는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생 시절 내내 50번 밖에서 맴돌았을 정도로,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에서부터 성차별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면접이나 최종 선발 시에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공평하게 채점을 하는 듯 보이나, 실상은 암암리에 성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능력 있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방해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 발전에 저해하는 행동이다.
다음으로, 교과서 수록사진에 성 역할 구분이 있다. 엄마는 항상 앞치마 차림에 아빠는 신문을 보고 계신다. 이는 학생들의 정서에 무의식 중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게다가 성차별은 비단 여성들에 한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낮에 운전해 오는 고객들 중에는 여성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차장을 재차 따로 만들어 놓는다던지, 여성에게만 판매되는 각종 상품들이 그것이다.
(중략) 1 더하기 1이 꼭 2라는 법은 없다. 남성과 여성, 이 두 성별이 힘을 합쳐 공정한 사회에서 공정하게 힘을 겨루어 더 나은 합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너지 효과요 윈윈(win-win)으로의 행복인 인 것이다. 양성 평등을 이루는 사회는 부강한 사회이자 성숙한 사회이며 결코 그 공동체에서부터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에 그 어떤 사회보다 안정된 사회이다. 최소한 평등에 있어 우리는 결코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자각할 때에, 이러한 사회는 결코 요원한 사회가 아닌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존엄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조속히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
(-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최우수상을 수상한 본인의 양성평등 글짓기 내용 중 일부)
당시의 나는 특정 개인에게 ‘여성이니까 / 남성이니까 ~를 해야 한다’ 라며 주어지는 규범성과, 성별로 인해 기대되는 개인의 특성 등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 줄은 알았으나, 그 각 젠더에 주어지는 규범성의 농도와 강도 및 맥락적 의미는 동등하게 봤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여성이 여성이기에 고통받는 만큼 남성도 남성이기에 받는 고통이 있으며, 그렇기에 두 성별이 힘을 합쳐 공정하게 합의 결과를 도출한다면 ‘양성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양성평등을 이룩한 사회가 오면 개인들은 그 공동체로부터 떠나고 싶지 않아질 것이라며 장담도 하고 있다.) 즉 성별에 따라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 불공정하며 부당하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으나, 두 젠더 간의 불균형이나 불평등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상태다.
이 부분에서 젠더롤 규범에 대해 손아람 작가가 ‘세바시’ 강연에서 썼던 비유를 차용해보고자 한다. 바로 <차별 비용>이라는 개념인데, 여성과 남성 모두 이 사회 내에서 행동/사고 방식 등에 규범이 가해지지만 그 양상이 다른 이유와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는 비유적 개념이다. ‘차별 비용’이란 개인 혹은 사회가 현재 존재하는 차별과 혐오 기제, 장치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각종 비용을 뜻한다. 남성이 말하는 “우리도 억울하다!” 가 대부분의 차별 비용에 속하는 사례일 것이다. 군대를 간다거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힘 쓰는 일을 도맡아 하게끔 기대된다든가, (요즘은 많이 양상이 변했지만) 데이트 비용을 많이 지불한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이 사회에서는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만을 ‘진짜 시민’ 취급 하기 위해 남성들만 군대를 보낸다. 군필자여야 회사에서 연봉을 더 받을 수 있으며, 군필자여야 ‘제대로 교육받은’ 사회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 물론 남성 개인에게 적용되는 징병제는 국가의 폭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에서 완전히 배제된 여성들을 영원히 2등 시민으로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의미다. 또한 데이트 비용이나 생활비 부양 등 ‘여자친구 혹은 아내,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건 남성’이라는 편견은 남성 개인에겐 짊어지고 가야 할 무게이자 강박일 수 있으나, 동시에 이 사회 내에서 경제적으로는 더 많은 자리와 기회로부터 끊임없이 여성들을 밀어내는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젠더롤 규범은 인간을 동등한 두 부류의 집단으로 나누어 각자의 행동규범을 정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영원히 2등 시민 자리에 묶어 놓도록 만든 가부장제의 차별적 산물이라는 뜻이다.
“가부장제의 기득권은 남성”이라는 말은, 남성 개인이 모두 귀족처럼 편하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산다는 뜻이 아니라, 본인들이 원했든 원치 않든 내야만 했던 ‘비용’이 있으며, 이는 구조적 기득 위에 올라가기 위한 비용이었다는 의미다. 비장애인인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도, 너무도 당연히 모든 것들을 비장애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장애인 관련 농담에 웃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만원일 때 휠체어 이동자가 있다면 난 ‘힘들게’ 계단을 이용해야 하겠지만, 주차 공간이 아무리 부족해도 난 장애인 주차공간에 주차하지 못하고 15분이나 걸어가야 하는 먼 곳에 주차해야 하겠지만, 이는 내가 이동권에 침해를 받지 않는 비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남성들 역시 “내 인생이 여자들보다 쉽지만은 않았단 말이야!” 라며 방어기제를 세우기보다, 젠더화 되어 있는 이 구조에서 본인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돌아보길 바란다.
또한 ‘양성평등’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양성평등’ 이라는 표현은 젠더 이분법적인 표현이라는 한계 외에도,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이 단순히 다른 것 뿐이니, 둘 다 각자의 힘듦이 있고, 이를 편견과 구분 없이 서로 사이 좋게 평평하게만 만들면 깨끗히 해결될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는 함정이 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썼던 글짓기 내용처럼,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어 표현에서부터 오는 오해가 있으며 이는 여전히 잔존하는 여성혐오적 문화를 철저히 가리는데 쓰인다. 양성평등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양 쪽 성별’간의 평등을 위해서, 왠지 양 쪽 모두에서 사이좋게 노력만 하면 해결될 것 같은 뉘앙스가 발생한다. 한 쪽 성별만을 문화와 역사로부터 늘 도구로써, 약자로써, 수단으로써, 대상으로써 소비해왔고 그 모든 것이 마치 인류 모두의 길이라는듯 구성원에게 가르쳐 왔던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혐오 맥락이 가려지는 것이다.
“남자들도 남자들 나름대로 힘들다.”
“여자들만 힘든 줄 아냐 우리도 똑같다.”
“그냥 남자든 여자든 요즘 청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힘든 것이지 여자가 뭐가 약자냐.”
“세상엔 원래 차별이 아닌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녀 역할이 다른 것 뿐이지, 이건 젠더불평등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양성평등의 함정 속에 빠진 자들이 세상을 여전히 너무 얕게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서로 서로 사이좋게 노력해서’ 라는 감성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분노하고 노력해서’ 뿌리 깊은 여성혐오를 뽑아내야만 성평등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지정받은 성별에 의해 모든 역할과 위치들이 정해졌다니, 이건 누가 됐든 분노할 만한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