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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May 03. 2020

#29. 말레카 3: 말레카에 남겨진 포르투갈 자취

포르투갈, 네덜란드로 그리고  영국으로 바뀌는 요새의 주인

포르투갈이 세운 산티아고 요새

‘동양의 부’를 목적으로 하는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발은 1488년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항구인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완성되었다.

당시 황금보다 더 귀했던 향료 독점을 위해 아시아로의 해양 진출을 서두른 결과다.

유럽에서 겨울에 사료부족을 대비, 도축한 고기의 저장성과 맛있게 숙성시켜주는 정향과 육두구는 동부 인도네시아 말루꾸군도에서만 산출되었고 서부 자바의 후추도 수익성 높은 상품으로 무슬림과 베네치아 상인을 비롯한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가격 폭등도 일어나곤 했었다.


이에1510년, 포르투갈 인도 총독 알부케르크는 고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동방 무역 지배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한해 뒤 1511년, 알부케르크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아시아에서 교역한 물건을 실은 자국의 교역선이 안전하게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기 위해 말레카가 중요한 항구가 될 것을 알고 함대를  나타나 점령하였다.

말레카 점령은 서양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첫걸음이 되는 해로 찬탈의 역사가 시작된 해였다.

말라카 해협을 제압한 포르투칼은 아시아 교역의 전초기지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안전한 거주지 겸 요새 'A' Famosa를 짓는 것이었다.

원주민 노예를 동원해 술탄 왕궁과 왕릉, 모스크를 철거한 후, 바다 근처 언덕 주위에 요새를 지었다.

요새는 두께가 3m나 되는 긴 성벽과 4개의 주요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4층 건물이었고 다른 건물은 탄약 보관실, 선장의 거주지 및 장교 숙소로 쓰였다.

대부분의 마을은 요새 성벽 안의 타운하우스(town house)에 모여 있었으며, 당시에는 산을 에워쌀 만큼 거대한 성채였다.

이후 말라카 인구 증가에 따라 1586년에 원래 규모를 능가하는 요새가 추가로 확장되었다.


산티아고 성문에 새겨진 "ANNO 1670",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로고

이후 포르투갈은 1513년 마카오에서 명나라와 교역을, 1543년 일본과도 통상을 열며 아시아와의 해상무역을 장악해 나갔다.  15,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둔 세계적인 경제, 정치, 군사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1578년, 세바스티앙 1세가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패하고 후계 없이 사망하여 승계권 위기를 겪으면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 왕국의 부속 왕국으로 전락하는 쇄락의 시기를 맞게 된다.


네덜란드의 말레카 입성

이에 반해 네덜란드는 1602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를 설립해 금융업을 발전시키며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네덜란드는 자국 생산품은 많지 않고 중개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얻던 나라로서 해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641년 말레카에 침공해왔다. 5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와 포격으로 7천 명의 전사자와 함께 산티아고 요새는 허물어져 버렸다.

130년간 말레카를 지배하던 포르투갈은 이 땅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제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을 대체하는 주요 유럽 상인이 되었다. 특히, 동인도에서 포르투갈의 무역소 대부분을 인수하여 네덜란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향신료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말레카를 접수한 네덜란드인은 1670 년에 산티아고 성문을 개조, 문 아치에  "ANNO 1670"로고를 새긴다.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로고이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말레카

여전히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어서, 네덜란드는 17세기 말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의 장기전과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 그리고 오랜 기간 영국과 영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마침내 4차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한 네덜란드는 이후 영국에게 기존의 상권을 잃기 시작했다.

1819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개발한 항구가 시초가 되어 오늘날의 싱가포르의 초석을 만들었다고 해서 동상으로 기념되는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처음 싱가포르 포구에 들어서면서 눈치를 봐야했던 나라는 이곳을 선점한 네덜란드인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의 나폴레옹 위세에 눌려 풍전등화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긴 경쟁을 멈추고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말레카를 영국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두 나라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맡는 대신 말레이 반도를 영국에게 양보한다’는 영란협정을 체결하여 영국이 말레이시아 전역을 통치하게 된다.

이제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부상했다. 산티아고 요새는 제 모습을 잃어야 했다.


영국은 요새 파괴 명령을 내려 거의 완전히 철거되었지만, 싱가포르 창시자인 래플스의 개입으로 산티아고 문과 스태더이스, 교회, 교도소를 포함, 요새로 가는 관문 두 개는 남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나마 오늘 포르타 데 산티아고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배경이다.


성채의 작은 문을 드나들어 보기도 하고, 불을 뿜었을 그 시절의 대포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벽에 남은 상흔을 들여다보다가 언덕 위로 오른다. 중간 참에서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인의 무덤이 내려다 보이기도 한다.

계단이 끝나면서, 언덕 위 벽체만 남은 세인트 폴 성당이 나타난다.  


세인트 폴 교회 (St. Paul’s Church) 

1745년 파괴된 망루 일부는 등대로 사용되었다고.
성당 안 벽에 세워진 네덜란드 귀족들의 의 비문


세인트 폴 교회는 말라카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시내 이곳저곳과 바다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잡았다.

1521년 포르투갈 지배 시절, 두아르떼 코엘료(Duarte Coelho)에 의해 완공되어 당시 기도원으로 사용되면서 포르투갈의 가톨릭 포교의 거점 장소 구실을 하였다. 1556년에 2층으로 증축되었고, 1590년에는 망루가 세워졌다. 포르투갈 인들이 공격당하기 직전에 교회를 요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붕에는 포반 등을 위한 구멍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다.


네덜란드가 들어오면서 개신교로 쓰이다가 광장에 설립한 새 교회로 옮겨갔다고 한다.

1753년에는 세인트 폴 언덕을 네덜란드 귀족들 매장지로 만들었다.

지금도 건물 안쪽 벽에는 여전히 네덜란드 인들의 비문들이 기대어져 있다. 그들의 비석은 라틴어와 포르투갈어로 새겨져 있다. '세인트폴 교회'란 이름도 이 시기에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이후 영국군이 점령하면서 한때 무기를 숨겨놓는 장소로도 쓰였다.

포르투갈이 쫓겨가고 나서, 카톨릭을 박해하던 네덜란드, 성공회인 영국군의 공격을 받은 성당은, 허물어져 내리는 벽의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다.

철성분이 함유된 홍토벽돌로 만들어진 벽면은 원래 붉은색을 띠었으나 지금은 군데군데 때운 흰색과 합쳐져 비구상 화가의 그림처럼 보인다. 포루투갈 패전사가 이 건물에서 실감된다.


사비에르 신부

교회 앞에는 사비에르 신부 동상이 말라카 해협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비에르 신부는 1506년 지금의 스페인 바스카의 나바라 왕국의 고위왕족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이후 성직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541년 포르투갈 왕 요청에 따라 교황의 동방특사 자격으로 리스본을 떠나 1년 뒤 포르투갈령 동인도 수도 고아(Goa)에 도착해서 3년간 전교활동에 전념한다.

1545년 9월경 이곳에 상륙, 이곳이 동아시아 최초로 가톨릭교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미로운 곳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1월 뉴기니아섬 서쪽 몰루카스제도를 방문하고 말레카로 돌아오다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세례를 준다. 그리고 3년 뒤 그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2년 3개월간 복음을 전파, 일본교회 복음화에 큰 영향을 준다.

일본에서 복음를 전파하던 중 중국이 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중국 선교로 목표를 수정해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이곳 말레카를 거쳐 이듬해 인도 고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상치안 섬에서 약속된 안내자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죽은 후 인도 고아지방으로 이장하기 전 이곳에 6개월 동안 묻혀 있었다. 안치기간동안 시신이 훼손되지 않아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문 앞에 서있는 사비에르 신부의 동상은 한눈에 봐도 동상의 손과 발이 파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인도의 고아로 보내지기 위해 관을 열어보니 전혀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상을 세웠을 때 옆의 나무가 벼락 맞아 쓰러지며 동상의 한쪽 손과 발을 파손했다고 하는데, 신부가 안치될 때 한 손과 한쪽 발이 없는 상태와 일치됨에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몇 년전에 다녀온 마카오 콜로안에 있던 노란색의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성당 안에는 사비에르 신부의 팔뼈가 안치되어 있다고 들었다.

 

사비에르 신부님 동상

1540년 사비에르 신부와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가 함께 파리에 설립한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만든 장본인이다. 우리나라 예수회도 사비에르가 세운 예수회 소속이고 서강대학교를 설립한 교파이다.


한가지, 사비에르 신부는 일본에 가톨릭교를 전파하면서, 소총을 전했다고 한다.

섬나라 일본이 소총을 사용할 첫번째 대상국은 어디겠는가?

우리나라에게 그 총을 전했주었더라면 우리의 근세사가 혹 달라졌을까나?

몇 해 전 방문한 일본의 나가사키 한 전시관에는 유럽으로부터 전수받은 여러 신무기와 정교한 함대, 선박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박물관에서는 그 비슷한 것조차 전혀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전쟁 장비들이었다.

그걸 보노라니,  불현듯 1592년 임진왜란을 포함해서,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일본 침략에 시달려왔던 우리나라의 수난사에서 이 무기들의 역할을 가늠해보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노략질과 왜란으로 오랜 시절을 피폐하게  살아야 했던 기혹한 정황을 유추시키는 전시물들이었다.  

하필 그 박물관 창문 너머로는 군함도에 이르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벽에는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려는 포스터가 붙어있어 심사가 그지없이 뒤틀려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카오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성당

포르투갈의 흔적, 포루투갈인 정착지(Portuguese Settlement)

포르투갈이 남긴 자취는 위 두 곳, 산티아고 성문과 세인트 폴 교회 외에 추가되는 곳이 있다.

말라카에서 5km 떨어진 우종 파시르(Ujong Pasir)의 말라카 포르투갈 커뮤니티, 포르투갈인 정착지(Portuguese Settlement)이다.

말라카 포르투갈 인(Malacca portuguese)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기에 생겨난 포르투갈 인과 말레이 인이 혼합된 말레이시아 인종 그룹이다.
1933년 말라카의 11헥타르의 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말라카 포르투갈 인(Malacca Portuguese)과 그들의 문화를 위한 안식처 조성을 위해 구입되었다.
단순한 어촌 마을이었던 세인트 존 마을로 말라카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던 말라카 포르투갈 인들이 모여들었고, 말라카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어 마을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전 세계의 다른 많은 포르투갈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정착지에서는 성 요한의 잔치(Festa Senjuang, 6월 2일)와 함께 성 피터의 향연(Festa San Pedro, 어부의 수호 성자, 6월 29일)이 열린다.
이 축제에는 말레이시아와 해외로부터 약 10만 명의 방문객이 참석한다.
축제에서 말라카 포크송(Malacca Portuguese Folk Song)을 들을 수 있으며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가 브루뮤(Branyu, 전통춤) 음악의 리듬을 연주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축제에서의 중요한 행사는 많은 어획량을 기원하기 위한 어부 보트의 축복 이벤트이다.     

역사의 발자취는 세월이 오래 흐른 다음에 더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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