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시내버스는 빈펄 리조트- 여행자 거리- 대성당- 담시장 - 뽀나가르 탑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여행지 주요 코스를 운행한다
참파 왕국이 세운 뽀나가르 사원은,
‘10개의 팔을 가진 여신’이라는 뜻의 뽀나가르 여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주황색 벽돌로 건축한 힌두교 사원이다. 뽀나가르 양식으로 따로 분류될 만큼 특별하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란다.
사원 입구에 들어서자 대칭으로 도열한 기둥, 만다파가 맞는다.
만다파
만다파 가운데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는 이 사원의 중심 탑인 탑진을 향한 계단이 놓여있다.
힌두교 사원에서 '신에게 봉헌된 사원'에 오르는 계단의 경사각도는 72도라고 한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중앙사원의 계단과 비견된다.
계단 위 중앙 사원이 탑진.
만다파를 끼고 나선형 계단을 오르니, 널찍한 사원 마당에 꽃과 음식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따라 탑진사원으로 들어가 본다.
‘뽀나가르’ 여신을 모신 탑진은 3개의 탑 중 가장 높은 25m 높이다.
탑진 사원 안에 ‘뽀나가르’ 여신과, 창조와 파괴를 상징하는 쉬바 신의 상징 '링가'가 놓여있다.
아들 점지의 효능을 믿는 많은 이들이 제물을 바치며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다.
사진의 같은 복장들은 복장 규정에 저촉되는 사람에게 무료 대여해 준 옷
여신의 아들, 가네샤를 모시는 탑남도 있다.
더위를 무릅쓴 관광객들의 인증숏으로 사원 마당은 활기 가득하다.
수리 위자야 침공으로 파괴된 참족의 사원
이 사원은 베트남 중남부에 터를 잡고,
약 1600여 년간 이어진 참족의 나라로, 동남아 최장수 왕국, 참파 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국가 체제라서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각기 번성하던 참파 왕국(Cham Kingdom) 내에는, 크게 대립한 두 개의 파가 각각 소유했던 성지가 있었다.
북부지방을 지배했던 드어(Dua) 파는 스리사나 바드레스 바라 신을 기린 미썬(My Son) 성지를 건축했다.
5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주요 건물을 완성했고, 11세기까지 계속 이어서 성지(聖地), 성역(聖域)으로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며 종교적 의식을 거행했다.
오늘날, 다낭 참 박물관 함께 참족의 힌두 유물과 유적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는 호이안 인근, 미썬 유적지가 그곳이다.
또 하나는,
남부지방을 통치했던 꺼우(Cau) 파가, 뽀나가르(Po Nagar)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지은 뽀나가르 성지, 바로 이곳이다.
사트 아바르만 왕에 의해 757년에 처음 만들어져서 이후 약 500년간 건설을 거듭해 온 이 사원은, 남아있는 참파 왕국의 유적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목조로 지어졌으나, 화재나 전쟁으로 파괴되었는데, 수리위자야의 침공도 큰 몫 했다.
*해양무역 경쟁국인 팔렘방의 수리 위자야가 동쪽으로 교역을 확대해 가던 중인 774년 냐짱(Nha Trang)에 이어 787년에는 판랑(Phan Rang)까지 2차례 공격을 해왔다. 이때 많은 유물과 문헌들이 파괴, 훼손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원은 10–13세기 것이라고 한다.
< 뽀나가르 사원을 파괴한 수리 위자야 >
말레이 반도의 남부 해안 지역의 수리 위자야 제국은 7~13세기에 번성한 해상무역국이다.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이라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통해 8세기에 접어들어 팔렘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냐짱의 참족을 공략, 뽀나가르를 불태우던 시기가 수리비 자야가 동쪽으로 해상세력을 넓히던 8세기이다.
서방의 이슬람 제국에서 상선(商船)이 자주 동쪽으로 나온 시기이고, 당대(唐代)의 중국도 이곳의 풍부한 시장성을 노려 나라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스리위자야는 중계 무역지 구실을 하면서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우리나라의 신라, 제주도인 탐라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활동을 통해 번영했다. 또한 많은 불경을 번역할 만큼 당시에는 불교가 융성한 나라이기도했다.
동남아의 해상을 장악한 이 왕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최전성기 10세기 이후로 쇠퇴해지다가 14세기에 몰락했다.
(*정확하게는 당시 수리위자야와 동맹관계에 있던 중부 자바의 '사이렌드라 왕조'의 해군 공격이었다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불교 유적인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을 건설한 사이렌드라 왕조의 사마라뚱가 왕 사후, 권력투쟁에서 패한 왕자가 팔렘방 외가로 옮겨가 수리위자야에서 이어짐으로써, 침략군을 사이렌드라가 아닌 수리위자야로 알려지게 된 것이란다.)
1377년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의 공격으로 팔렘방이 패하자 싱가푸라(Singapura, Singapor)로 피신해 있던 파라메스와라(Pawameswara) 왕자가 현재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지역에 피신하면서 그곳에 왕국을 세웠다.
말레이 반도 최초의 독립 국가로 간주되는 말레카 술탄국이다.
사원 박물관의 사진 속에는
사원을 한 바퀴 돌다가 작은 박물관을 보고 들어가니, 예상 못한 에어컨 냉기로 잠시 천국을 경험한다.
몇 개의 전시물과, 벽면에 걸린 사진들이 전부라서 얼핏 조촐하다.
열 개의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뽀나가르 여신상을 본다.
손이 2개뿐이라서 남에게 내밀어 줄 손이 부족한 우리 인간들!
저렇게 열 개의 손을 가졌으면 좋은 것들을 들고 있다가 두루 나누면 좋을 것을, 여신은 굳이 무기들을 들고 있다.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들여다보니, 이 사원의 중요한 인증서 격이다.
왕국의 몰락과 함께 내팽개쳐진 사원의 옛 모습으로, 이를 발견한 외국인에 의해 찍힌 사진들이란다.
밀림 안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사원들 사이사이에서 나무는 멋대로 자라나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유적의 높이를 넘보는 나무의 크기에서 유적들이 방치된 세월의 길이가 추정된다.
성지와 문화의 중심지로 생명력 넘쳐야 할 사원이,
질곡의 인간사에 동반하여, 덩달아 스러져있는 오래된 사진이다.
방금 돌아본 사원은, 유적 아닌 여늬 신축건물처럼, 내겐 느껴진다.
보수로 껴든 새 벽돌의 주황색 선명함이, 탑에 깃들었어야 할 세월의 자취를 압도한다.
후에 근처의 무너져가는 미썬 성지가, 훨씬 실감 나게 옛 시절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박물관의 흐린 사진 한 장은, 뽀나가르 사원이 유적임의 증명서 격이다.
여기저기 깨진 벽돌을 뚫고 자라는 나무를,
힘겹게 이고 선 사진 속 만다파의 옛 모습이,
나라 없이 흩어져간 참족의 근세사와 완벽하게 매칭된다.
사원 안의 무희와 악사들
피리와 북을 치는 악사들, 그에 맞춰 머리에 단지를 이고 춤추는 무희들.
팔과 손가락의 독특한 춤사위는 나이 지긋한 무희들의 동작이 더 원숙하다.
공연팀의 진지함이 내 박수를 후하게, 더 오래 유발한다.
'몰락한 참족들이 사원에서 공연을 하거나, 관광객에게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는 글을 읽었었다.
다소 무거운 표정의 공연팀은 진짜 참족일까?
인구 일억을 향해가는 세계 15위 다인구 국가 베트남이,
겨우 40만 명 정도만 남아있다는 참족을 위한 배려라면, 그나마 칭찬받을 일이다.
참족이 흩어져 간 나라 혹은 어느 지역에서 든 그들의 목소리를 냈단 뉴스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가까운 다리는 사원 앞 정차 시내버스가 지나는 다리이고 멀리 보이는 다리는 시내 해안도로와 직선으로 연결된다.
강 언덕에 몰려오는 바람과, 나무 그늘로 더위를 식힌다.
강물이 바다로 나가는 냐짱 시내 쪽, 건설 중인 고층빌딩의 독보적인 높이가 시선을 끈다.
사원의 오른쪽, 강 상류 쪽은 모래톱이 강 따라 뻗어있고, 강가 양쪽으로 늘어선 고급 리조트, 초가지붕 방갈로들이 야자나무와 어울려 화보를 만든다.
냐짱은 지금 한창 건설 중이다.
보다 더 많은 관광객 내방은 누구에게 득일까?
1600년 역사 참파왕국의 오늘은 역사적 공백기일까,
아니면 종영일까?
그래서 잠시, 참파 왕국의 역사 편을 rewinding .
역사에 관심 없는 분은 이하 skip! 글이 길어요.
참파 왕국의 역사
베트남에게 멸망당한 참족의 나라 참파왕국
세계사 교과서 앞부분에서 만난 '안남도호부'를 비롯, 우리는 대월, 안남과 베트남을 같은 나라로 안다.
이 베트남 국민의 86%가 킨족(혹은 비엣족)이다.
킨족과 참족은 다르다.
베트남족과 참족은 오랜 숙적 관계였다가,
베트남 북부에서 출발한 킨족이 '남진정책'을 펴서, 중남부로 남하하면서 참족을 멸망시키고, 오늘의 베트남을 이뤘다.
멸망한 참족은 참파 왕국을 세운 민족이다.
이들은 보르네오에서 2천 년 전에 베트남 중남부로 이동해 왔다
한자 문화권으로 유교 혹은 불교국이었던 베트남과 달리,
힌두교를 받아들인 전형적인 말레이계 혹은 인도네시아계 민족이다.
이들이 세운 뽀나가르 사원이나 미썬 성지가 힌두교 사원인 이유다.
참파는 9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북쪽의 베트남이 10세기에 중국으로부터 부분적인 독립을 이루면서, 두 나라 간 역학관계의 변곡점을 맞게 된다.
두 나라는 약 5세기 동안 숙적이 되어 전쟁을 했다.
이 기간에 다른 주변 나라들과의 전투까지 더해져 점차 쇠락해진 참파는, 1471년 레왕조의 타인 똥이 이끄는 전투에서 패하면서, 베트남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초, 남부 메콩강 빤두랑아(판랑)이 응우옌 왕조에 마지막으로 넘어가면서,
1832년 합병으로 참파 왕국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600년 역사를 가진 동남아 최장수 국가 참파는 그렇게 끝났다.
참족은 오늘날 여러 나라에 흩어졌거나, 베트남 현지인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도래한 참족
기원후 192년 중부 도시 후에에서 시작, 1832년 완전 종식기까지 1600년 역사를 가진 참파 왕국은 참족이 세운 나라이다. 이들은 현재의 베트남인과 인종적, 문화적으로 매우 다르다.
참족은 인도네시아인으로 보르네오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며 말레이어파에 속함으로써 남아시아 베트남어와는 상이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참족은 말레이계, 인도네시아계 민족이다.
이들은 2세기 초반부터 후한 령인 현 베트남 남부로 쳐들어와 한나라 관리들을 죽이곤 했다. 그러다가 192년에 중국 관리 출신 구련이 임읍(林邑, Lâm Ấp)'을 세운 이후, '환 왕(環王)', '점성(占城)'. '참파(占波:점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해상무역으로 번성한 참파 왕국
참파 왕국은 베트남의 중남부에서 번성하며 7세기경에 유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중국령인 동경 지방에도 압력을 가하는가 하면, 미얀마, 태국 베트남이 대두되기 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강자였다. 중국 역대 왕조와의 충돌, 그리고 타협 속에 성장한 참파 왕국의 전성기는 9세기에서 10세기까지이다. 이들은 중국, 인도, 아바스 왕조(Abbassid Empire) 사이에서 비단과 향신료 목재 등의 중계무역과 해적 행위를 통해 번영을 누렸다. 호이안은 7세~ 10세기에 해상무역의 중요한 기지가 되어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다. 9세기 전성기에는 후에부터 지금의 호찌민 남쪽, 메콩 델타 북쪽까지 뻗어나갔다.
베트남의 남진 정책
10세기에 이르면서 북쪽의 베트남 기세가 상승했다.
그들은 기원전 111년, 중국 전한의 무제가 보낸 군대에 정복당한 이후, 939년까지 무려 1050년 동안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939년에 비로소 베트남 왕조를 세우면서 여전히 종주국 관계이긴 하나 중국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베트남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중국을 막으면서 남쪽의 참파를 공격해 그 땅을 서서히 빼앗는 이른바 북수남진 (남띠엔) 정책을 폈다. 참파의 땅은 베트남보다 넓고 날씨가 따뜻하여 농사가 잘 되니, 베트남으로서는 참파의 영토가 필요했다.
979년 참파 왕국은 딘 왕조(966-980)를 연, '딘 보 린' 사후 혼란해진 베트남을 침략하려다가, 태풍으로 실패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딘 왕조를 계승한 레 호안은 북쪽 변경이 안정되자, 982년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참파를 침공한다.
참파의 수도 인드라푸라(현재의 다낭 부근 동두옹)에 쳐들어가 도성과 종묘를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궁중의 무희들과 인도인 승려를 포로로 붙잡아 귀환했다.
이에 참파는 북쪽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쉬운 인드라푸라를 버리고, 훨씬 남쪽인 비자야(현재 빈 딘)으로 수도를 옮겨갔다. 1000년의 일이다.
1044년 베트남의 後 리 왕조 태종 황제는, 직접 참파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참파 영토 세 곳을 넘겨받았다.
참파와 베트남의 5세기에 걸친 전쟁이 이렇게 계속되는 중, 참파는 다른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으로 점점 열세에 놓이게 된다.
*800년 전 우리나라 사위? 된 화산 이 씨 시조, 이용상 씨가 베트남의 리 왕조(1009~1225) 6대 왕, 영종의 7번째 아들이라고.
참파와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
1177년, 참파는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 크메르의 수도 앙코르를 공격했다.
중국의 동남 해안 지역과 해남도를 유린한 뒤의 여세를 몰아, 수르야바르만 2세(재위 1145~1150)의 사망으로 혼란한 크메르 제국을 공격한 것이다.
수도인 야소다라푸라를 약탈하고, 왕을 죽이는 데 성공한 후 4년간 크메르를 지배했다.
그러자 1190년, 자야바르만 7세(재위 1181~1201)가 이끄는 크메르 군은,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참파를 공격, 왕 인드라바르만 4세를 사로잡아 본국으로 끌고 가는 한편, 참파에 판두랑가라는 정권을 세워 지배하였다.
바이욘 사원의 석벽 부조에, 자야바르만 7세가 참족을 물리치는 모습이 새겨져있다. (여행 가이드는 이 장면의 설명을 빠트리지 않는다.)
바나나 잎 모자를 쓴 적들이 참족이다.
참파인 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여 판두랑가 정권을 무너뜨렸다.
1203년, 크메르는 다시 침공해 참파 영토 전체를 장악했으나, 참파는 1220년 다시 주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참파는 크메르의 집요한 공격과 원나라의 침공에 시달려, 1300년대에는 베트남에 비해 국력이 훨씬 뒤처졌다.
1312년 베트남의 영종 황제는, 참파 수도 비자야를 점령하고, 아난다를 참파의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아직 참파인들의 끝은 아니었다.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
쇠퇴해 가던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는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 혹은 포 비나수오르 ) 왕의 재임 기다.
그는 참파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다.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빼앗아간 옛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1361년~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베트남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을 세 번에 걸쳐 약탈했고, 중부까지 밀고 내려왔던 베트남을 다시 원래 그들의 땅 북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1390년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쩨봉응아가 죽자, 지도자를 잃어버린 참파의 기세는 급속도로 꺾인다.
참파 왕국의 종말
1402년 베트남이 참파를 공격해,
중부 용아이 지방을 빼앗고,
1446년 비자야를 함락하고 국왕을 사로잡았다.
1470년에 참파왕 반 란 짜 또안(마하사잔)이, 수륙 10만의 군대로 베트남 호아 쩌우를 침공했으나,
이 기습적인 공격의 역풍의 결과는 참담했다.
1471년
베트남의 後 레 왕조 4대 성종(聖宗),
레 타인 똥(재위 1460~1497)이 군사 25만(70만?)을 이끌고,
수도 비자야 성으로 쳐들어가 참파 왕 마하 사잔을 생포했다.
6만 명 이상의 참족이 사망하고, 3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참파는 카우타라(나짱)과 판두랑가(판랑)에서만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왕인 마하 사잔(재위 1460~1471)이 붙잡혀 간 후, 뒤를 이어 동생인 마하 사자이(재위 1471~1474)마저 포로가 됨으로써, 사실상 참파왕국은 종국으로 치닫았다.
참파 왕국의 왕조계보는 192년 제1왕조 ‘스리 마라’로 시작, 1474년 제15왕조 76대 ‘마하 사자이’에서 끝을 맺는다. 76대 1282년이다.
(※ 참파 왕국의 역사를 1300년으로 기술한 것은 왕조의 지속기간에 근거한 산출 숫자로 생각된다.)
그나마 위 두 지역, 카우타라(냐짱)와 판두랑가(판랑)마저 1693년 베트남의 메콩델타 진출로 빼앗기면서, 참파는 완전히 거점을 잃었다.
이름뿐인 마지막 왕, 포 치엥이 캄보디아로 달아나자, 10년 후 1832년 참파의 모든 영토는 베트남에 강제로 편입되어, 1640년 동안 이어져 온 참파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참파 역사가 1600년으로 기술되는 시점이다.
포기할 수 없는 희망, 독립
1822년, 명목상으로 참파의 마지막 왕이었던 포 치엥(Po Chien)은 많은 수의 참족을 은밀하게 집결시켜, 오늘날의 캄보디아 남부 지역 캄퐁참으로 이주하였다.
캄보디아 제3의 도시 캄퐁참은 ‘참파인의 항만’ 이란 뜻이라고 하며, 캄보디아 거주 참족이 베트남보다 더 많다. 특히 톤레샾 호수의 수상가옥인들 중에 참족이 많다.
일부 참족들은 말레이 반도 북부인 뜨렝가누(Tenegganu)로 이동하였으나, 험난한 여정 때문에 일부만 생존하였다.
일부는 오늘날 통킹(Tonkin) 만을 사이에 둔, 중북부 해변 건너편의 하이난(Hainan) 으로 이동하였다.
베트남 영토를 벗어나지 못한 참족 일부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베트남의 강력한 동화정책을 견뎌내야 했다.
참족의 모계 중심을 무너뜨리는 결혼을 조장하거나, 힌두교 혹은 이슬람교도인 참족의 금기 식품을 강요한 것은, 민족적 색채를 지우려는 시도의 일부였을 뿐이다.
베트남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되자, 산속에 남아있던 참족들이 독립의 희망을 품고, 프랑스군의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군을 통해 잃었던 나라를 되찾으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전쟁 후 1954년 10월 프랑스 군은 모두 떠나고 말았다.
몇 년 후,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월남전 때에는, 최대의 격전지인 다낭에서 미군에 협조하며 또다시 희망의 끈을 잡아보지만, 미군마저 1973년 결국 패망하여 떠났다.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남은 것은 ‘외세를 등에 업은 배척자’란 월맹 정부의 가혹한 낙인뿐.
나라 밖 독립운동으로,
베트남 전쟁 중인 1963년에, FULRO(억압인종 해방을 위한 연합전선) 중부 고원의 방면군, 이밤 에뉴올 의장(에데족)이 수립한 참파고지 임시 정부가 있었으나 1969년에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 반티 에우에 투항했고, 이밤 의장도 1975년에 폴포트파에 살해당했다.
중부 고원 방면군의 캄보디아 잔존 부대였던 펜 아윤은 1992년에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 사무총장 아카시 야스시에 투항할 때까지,
그리고 베트남 잔존 부대인 투니트덴은, 1995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주석 레득아인에게 투항할 때까지,
20년간 게릴라전을 계속했다고 한다.
흘러 들어간 나라 크메르 루즈에서, 종교문제로 학살을 당하거나, 때로는 자립에 위협을 받으며 나라 없이 살아가는 소수 민족이란 이름의 참족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