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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냐짱 3. 소신공양으로 역사 물길 바꾼 틱꽝득스님

베트남 민주화 불길을 소신공양으로 지핀 스님과 롱선사

by yo Lee

거대 흰 불상이 있는 롱선사와 승려 비

사원에서 롱선사행 6번 버스가

코앞에서 떠나간다.

다음 버스는 30분 기다려야 한다니,

길 건너편 시장 입구 좌판에서,

현란한 색으로 시선 끌어모으는 꽃, 과일 따라,

전통시장으로 구경 나선다.

이 도로의 오토바이 행렬은 말 그대로 홍수다.

평소답지 않게 겁이 잔뜩 나서,

주민들 옆에 꼭 붙어서, 따라 건넌다.


더러 생경한 과일, 생선, 음식들이 즐비한 시장 안은, 현지인과 더불어 관광객들로 만원이어서, 발길 옮기기가 힘들다.

눈요기만으로도 풍성해진다.

길 더듬어 가다 보니 맨 끝에 학교도 있다.


뽀나가르 사원 언덕에서

너머 보이던 흰 불상이 있는 룽선사는

냐짱 기차역과 400m 거리이고,

시내버스 정류장에 바로 붙어 있다.

프랑스 식민시절, 반 프랑스 운동을 주도했던 승려가 1889년에 지은 사원이다.


베트남의 역사를 중국 통치 천년, 프랑스 통치 100년, 남과 북의 전쟁 20년이라고도 한다.

참파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베트남은 중국 왕실에 의해 약 천년 넘게 지배되다가, 939년에 독립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진출의 발판이 되어 또다시 외세에 서서히 잠식되었다.

통상 교섭 요구를 거절하고,

가톨릭교도를 박해한다는 구실로,

프랑스는 전쟁을 일으켜 1862년 베트남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부 베트남 3개 주(코친차이나)를 할양받는다.

이어서,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 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인도차이나에 진주해 있던 일본도 물러가고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이 독립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베트남은 독립을 위한 (제1차 )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프랑스와 비엣민 간의 전쟁이다. 1954년 7월 20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어 그해 10월,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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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4m, 좌불상 14m 높이이다. 불상 하단에 독재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스님들의 명패들이 쓰여있다.

룽선사는 본래 북쪽 언덕에 있었으나, 1900년 태풍 피해를 입고,

현재의 낮은 곳으로 이동, 몇 번의 복원과 증축을 거쳤다.

전형적인 베트남 2층 8작 지붕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곳곳에 용의 조각이 있다.

사원 마당을 지나 오른쪽 총 152개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물 위에 세워진 누각 너머로 와불을 만난다.

그 미소가 푸근하니,

마치 시골 동네 어른의 낮잠을 보는 듯하다.

거칠어진 숨을 잠깐 진정시키고, 언덕 위 흰색 불상을 향해 다시 계단을 오른다.


총 24m 높이인 좌불상은

3m 높이의 좌대 위에

7m 높이의 연꽃, 그 위에 14m 높이의 좌불상이 놓여있다.

주위에는 7개의 아라한 동상이 있고

그 앞에 길이 7.2m의 용, 한 쌍도 있다.

이 사원의 상징인 백색 불상은

고 딘 디엠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스님들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불상 아래에 목숨 바친 승려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베트남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승려들 그리고 틱쾅둑 스님의 소신공양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경.
사이공 시내에 위치한 주(駐) 베트남 미국 대사관 교차로에 수십 명의 불교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앙에는 안쾅 사원의 67세 고승(高僧) 틱쾅둑(釋廣德)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제자 승려가 스승의 주위를 돌며 가솔린을 흠뻑 부었다. (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었다고도)
틱쾅둑 스님은 준비했던 라이터를 꺼내 자신의 가사에 점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라이터가 가솔린에 젖어 불이 붙지 않자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성냥갑을 건네주었다. 스님이 성냥을 그어 가사에 점화하는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불길에 휩싸인 틱쾅둑 스님은 자세 하나 흩뜨리지 않고 불길에 온몸을 맡겼다.
주위에 있던 비구니들은 화염에 휩싸인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고, 일부 비구니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시위 진압을 막기 위해 주변에 출동했던 베트남군의 일부 병사들은 ‘받들어 총’ 자세로 예를 표하기도 했다.(당시 인구의 80%가 불교신자였다니 그 병사들도 불교도였던지... )
틱쾅둑 스님은 그 전날 제자들에게 “만약 내가 소신공양 중 앞으로 넘어지면 나라가 흉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
내가 뒤로 쓰러지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평화를 맞게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불길이 거세지자 틱쾅둑 스님의 상반신이 잠시 앞으로 기울었다.
살이 타고 뼈가 드러나는 순간까지 스님은 세 번이나 앞으로 쓰러질 위기를 맞았으나
마지막 순간 뒤로 조용히 넘어졌다.
소신공양 당시 모습

< 뉴욕 타임스 기자의 기록 >

뉴욕타임스의 베트남 특파원으로 현장에 있었던 데이비드 핼버스탬 기자는 당시 틱쾅둑 스님의 분신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빨리 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면서도 틱쾅둑은 미동은커녕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것이 이후 베트남 정권을 파멸로 몰아넣은 틱쾅둑 스님의 분신 사건이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은

어린 시절 가톨릭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성장한 후에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독신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국민의 80%가 불교 신자인 나라에서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권력과 부(富)의 기반인 토지를 장악함으로써, 계급갈등 구조가 심화되었다.

베트콩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불교 마을과 사찰들을 폭파, 철거시켰다.

또 많은 불교도들과 승려들을 베트콩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처형했다.


1963년 6월의 소신공양은 고 딘 디엠(吳廷琰) 대통령의 독재적 불교 탄압에 대한 항의였다.

이 도화선으로

1963년 11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은 무너졌다.

<출처 : 미래한국>

티엔무 사원(Hue)의 파란 승용차. 뒤에 소신공양 당시 사진이 있다.

2015년

후에(Hue)의 티엔무 사원 방문 시,었던 사진이다.

사원 후원 차고 안에 주차(전시)된 파란색 승용차.

차의 후방에 걸린 사진에,

이 차가

소신공양 현장에서 불타고 있는 스님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사이공까지의 2천 km, 스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고

이제 홀로 돌아와 그날의 기억을 안은 역사의 유물 되어 멈춰 있는 파란색 차!

혹 이방인 관광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진 않을는지...

2015년 여행 당시에는

베트남 가이드의 설명을 못 들어서 분신사진이나, 6시간 화장에도 타지 않았다는 스님의 심장 사진들이 지닌 사건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위의 발췌문은 여행 후 돌아와 검색한 내용이다.

당시의 현장 모습은,

검색해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뒤로 넘어지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유언은 자신의 분신에 이어 또 한 겹의 이중적 설정리라.

타들어 가는 자신의 육신을 끝까지 통제, 뒤로 넘어짐으로써, 이를 보는 이들이 민주화를 위한 항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전진하도록, 한번 더 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초월적 경지를 보여 준 틱꽝득 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도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몇 번이고 나를 충격과 감동 속으로 몰아넣는다.




뽀나가르 사원에서는 화창하던 날씨가 음울한 회상을 더해 진한 회색빛 차양을 폈다.

부는 바람맞으며 냐짱 시내를 내려다본다. 탑신의 모습도 보인다. 트라튜이산은 시내 전망대다.


내려가야 할 152개 계단은 올라올 때보다 관절염 환자에게 더 위협적이다.

계단을 피하고자 옆길을 살피니,

키 낮은 덤불 새로 난 길이 보이긴 하나, 확실치 않다.

나무 그늘 아래서 관광 상품 몇 개와 차 끓일 용구를 벌려놓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손짓으로 '가도 되는 길'인지 물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할 수 없이 계단으로 중간쯤 내려오니

또다시 곁가지 옆길이 드러난다.

이 길로는 내려가도 되겠지 싶어, 일단 길에 접어들면서도,

미심쩍어 슬쩍 언덕 위를 올려다본다.

주욱 내 거동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건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가게주인 그녀가 이번에는 ‘맞다’고 크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잡상인이라는 피곤할 일상에서,

차 한 잔 팔아주지 않은,

그저 스쳐 지나는 이방인 안위에 마음 쓰는 여백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값지다.


냐짱 밤의 열기 속에서

냐짱 대성당을 돌아보고 주변의 유명하단 국숫집을 찾아본다. 위치 표시해온 인터넷 지도를 들고 주변을 몇 바퀴 돌아도 찾을 수가 없다.

정보란 바뀌기 마련이지만...

나머지 몇 군데 추천 맛 집은 에어컨 있는 실내가 아니다.

맛집은 포기하고 서늘한 피난처, 해변 가 대형 마트로 갔다.

쇼핑에 분주한 한국인들이 많다. 덩달아 짐 될 걱정 잊고 커피 몇 봉지를 주워 담았다.

저녁거리로 푸드 코트에서 샐러드, 과일, 그리고 식사가 될 만한 음식들을 주섬주섬 담았다.

식품코너의 중년 종업원이 진지하게 권하니 마달수 없어 코코넛 밀크 음식도 담았다. 추천자의 표정을 봐서는 이들의 최애 음식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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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오니 옆의 서양 여성이 큰소리로 통화 중이다.

이 후덥지근해서 에어컨 조절기로 온도를 낮춘다.

20분 넘게 큰소리로 통화하던 여성이 마침내 끝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냉큼 에어컨을 끈다.

침대에 쳐진 이 숙소의 커튼은, 공간 분리 기능과 단열 효능이 좋 재질로 빈틈없는 가림막이다.

커튼으로 자기 공간 온도조절이 가능한데도 말도 없이 제 멋대로 에어컨을 끄는 행위가 당돌하다.

다인실의 예의를 말아먹는 그녀의 무례에 걸맞게 나도 다시 에어컨을 켠다.


그 사이 내 건너편 이층 침대에 새 숙박객이 들어왔다.

커튼을 젖혀 '어디서 왔냐'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니 한국인이란다. 반갑다

그렇잖아도 사온 저녁거리를 혼자 먹을 일이 서먹하던 차였다.

함께 먹기로 하고 주섬주섬 사 온 음식을 챙겨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투숙객들을 위한 숙소 꼭대기 야외 공간에는 식탁과 해먹이 있고, 주변 거리가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과 시원한 바람으로 방보다 훨씬 낫다.

과일, 야채샐러드, 빵, 그리고 추천받은 수프 등으로 차린 저녁식사를 그녀와 함께 나누었다.

대학원 휴학하고, 여행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엄마와 떠난 일본 규슈 여행 마지막 날 지진을 만났었던 얘기들을 나누는데 어디선가 집단의 함성과 한탄 소리가 교대로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하니,

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결승전에서 베트남이 카타르를 상대로 열전을 벌이는 중이라고 그녀가 알려준다.

비로소 아까 보았던 카페, 식당 안에 무리지은 사람들을 이해했다. 축구경기 TV 시청을 기다리던 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지던 외침이 어느 순간 폭발물처럼 터져 나왔다.

승리의 환호임을 알 수 있었다. 지축을 흔드는 함성소리가 숙소 인근 여기저기서 들린다.

우리도 그들의 승전보를 만든 주역, 박항서 감독을 생각하며 한껏 축하를 보다.

거리를 휩쓸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순식간에 불어난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박혀있었을까?

자동차 경적, 부부 젤라 그리고 타악기 소리로 범벅이 된 승전의 환호는 거리를 가득 채우고 밤하늘로 올라가 전 베트남인의 환호와 뭉칠 것이었다. 이 나라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지 아직 반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겪어봐서 아는데,

크던, 작던, 개인이던, 단체던 국제적인 승전보는 민족의 뼈아픈 근세사 반추가 안주되어 따른다.

그래서 더 크게, 더 오래 이 승리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리라.

목이 터지도록 지르는 그들의 환호소리에 괜스레 찡해진다.


“며칠 후 한국과 대진할 건데, 우리가 이길 경우 대비해서 베트남 그전에 떠야겠어요.”

그녀 말에 동감이다.

엄청난 규모의 집단 열기를 보자니 차츰 두려움도 느껴진다.

이에 식사 후 가기로 한 인근 밤바다 산책과 시내 구경 다 접기로 하고 내일 일정을 잡아본다.

탑바 온천과 보트 투어 중에 내가 챙겨 온 수영복을 생각해서 보트 투어로 결정한다.

그녀가 친구 만나러 나가는 길에 여행사에 들러 내일 투어를 신청하겠다며 숙소를 나갔다.


밤의 에어컨 쟁탈기

방에 돌아와 보니 아까 외출했던 젊은 중국 여성이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고 있다.

여행 초기에는 도미터리 이용이 꺼려졌다.

모르는 사람과 한방을 사용하는 것이나, 젊은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에 나이 든 내가 끼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이용해 보니 장점도 있다.

경비 절감과 예약이 수월한 점 외에도 홀로 여행에 대화 상대를 만나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익숙하지 않은 현지에서 서로의 동반자가 되기도 하였다.

치앙라이에서 옆 침대 태국 여성 덕분에 그녀의 렌터카로 도시 외곽 관광지에 동승하는 행운을 얻었었다.

이래저래 도미토리 이용자로서의 암묵적 매뉴얼까지 어지간히 접수가 된 상태다.


아까 첫인사는 나누었던지라 ‘어디 갔다 왔냐’는 내 질문에 1시간 가까운 그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무척이나 발랄한 그녀는 중국 하얼빈에 살면서 현재는 미국 유학 중이라는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유년시절을 하얼빈에서 보내셨던 얘기로 장단을 맞췄다.

그러나 점차 그녀의 빠르고 유창한 영어가 나를 힘들게 한다. 폭포같이 쏟아지는 그녀의 이야기 물줄기가 잦아질 때쯤, 내 머리에서는 이미 쥐가 나 있었다.


이윽고 에어컨을 자꾸 끄는 옆 유럽 여성의 체온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줘야 할지 묻자,

그녀는 망설임 1도 없이

‘덥지 않을 온도에 이를 때까진 에어컨을 켜야 한다’는 주관에 객관을 버무린 명제 선언에 힘을 팍 준다.

암튼 오늘 밤, 이 방안의 '덥지 않을 실내온도'는 몇 도로 설정될지...

우리는 에어컨을 켜고 잠자리에 들었다.

외출했던 유럽 여성이 돌아왔다. 밤인데도 출입문 열 때마다 여전히 강력한 열기가 따라 들어온다.

자리에 들었던 유럽 여성이 일어나 에어컨을 끈다.

잠시 후에 중국 여대생 에어컨을 다시 켠다.

얼마 후 유럽 여성 끈다.

중국 여대생 다시 켠다.

침묵 속의 에어컨 전쟁 중이다.

하필 에어컨 조절기는 내 머리맡 기둥에 붙어있다.


결국 유럽 여성이 잰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간다. 리셉션에 항의하러 가나 보다.

다시 돌아온 유럽 여성이 자기 침대 쪽으로 나있는 창문을 소리 내며 활짝 열어젖혔다.

재난의 출발이었다.

그렇잖아도 거슬리던 숙소 옆 호텔 신축 공사장의 소음이 와락 쏟아져 들어왔다.

에어컨을 켜는 일에 승리해서 더위는 피했지만, 야간작업 금지 규정은 왜 없어야 하는지, 밤새 콘크리트 打設 과 쇠기둥 내리 박는 울림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여행객들은 이 소음에도 불구하고 단잠에 빠졌는지 미동도 없다.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운다.

아침에 이방을 처음 들어섰을 때는 도저히 예상치 못한 불면의 밤은 엉뚱한 데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이 밤만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이른 새벽,

유럽 여성의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를 뒤로하고 하얼빈 여대생은 유난히 커다란 2개의 배낭을 둘러메고, 스쿠버 다이빙하러 간다며 숙소를 떠나갔다.

매우 늠름한 걸음걸이의 그녀 뒷모습에서 중국인의 근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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