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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13.자다르1.플리트비체에서 자다르 가는 길

자다르 가는 버스 길,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by yo Lee

플리트비체에서 자다르행 버스를 타고

플리트비체 공원 1번 출구 근처 정류장에 도착해보니 거리 통제중이다.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모여들었는지 거리가 북적거리고 자전거 행렬이 늘어서기 시작한다.

어제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수목에 가려 보지 못했던 건너편 주차장에는, 자전거 시합을 대기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교통경찰이 친절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곧 통제가 풀릴 거라’는 의미의 말을 하는 듯하다.

알고 보니 플리트비체에서 매년 개최하는 연례행사 사이클 경기가 열리는 날이란다.

자전거 대회

예정 시간에 맞춰 다가온,

9시 45분 플리트비체 발 버스는

약 3시간을 달려 12시 반이면 자다르 닿을 것이다.

운 좋게도

맨 앞좌석에 앉아 동영상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장거리 운전에도 우리나라만 한 명의 운전사가 운행하는 것 같다.

오늘 두 운전사는

음악을 들으며, 사분사분 대화 졸음 없는 운행 하고 있다.


플리트비체에서 자다르로 가는 길 역시 변화무쌍하다.

한껏 초봄의 정취를 뽐내는 평원 사이를

크로아티아 BGM을 들으며 달려가는데, 4월의 유록색 물결 건너 저 멀리에 점차 회색의 육중한 바위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크로아티아의 디나르 알프스 산맥에는 가장 높은 산인 디나라 산(높이 1,831m)을 비롯, 높이 1,5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있으며 산맥의 대부분은 카르스트 지형이라, 크로아티아 절반 이상이 카르스트 지형에 속한다고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름다운 초록과 유록의 장원은 더 이상 우리를 배웅하지 않는다. 거칠고 황폐한 모습의 회색 화강함 험준한 바위산이 버스 창 앞뒤를 감돌며 얼굴을 내민다.

고도 550m의 플리트비체로부터 최저 1m 고도의 자다르를 향해 버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산 모퉁이를 돌기 시작한다.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될 만큼 경사가 느껴진다.

율리안 알프스에 이어지는 디나르 알프스는

이렇게 발칸의 등뼈에서 달마티아의 척추가 되어 자다르 입성의 우리를 긴장시킨다.


한참을 달려서야

호수 위 다리 Maslenica bridge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만든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3시간여의 운행이 끝을 보이는 것이다.

자다르 시내에 들어서서

여직 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KONZUM마트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버스는 터미널에 멈춰섰다.


자다르 역사

한때 크로아티아의 수도였으며 3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초기 로마에 의해 정복된 이후 여러 나라의 세력다툼에 휘말려온 운명은, 이 도시의 지명 변천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초 일리리안 족이 정착했을 당시에는 야데르(Jader), 그리스인들 정착 시는 이다싸(Idassa), 로마제국 하에서는 야데라(Jadera), 베니스 공국 당시에는 디아도라(Diadora),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을 시에는 자라(Zara)로 변하여 불리었다.

역사적으로 고대 로마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는 일리리아인이 세운 도시로, 고대 BC 9세기 일리리안족 정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BC 3세기 말부터 BC 1세기까지 로마인들은 일리리안 족과의 전투를 통해 로마의 지방자치로 귀속, 식민지화 하면서 이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고 나서 812년, 아헨 조약으로 비잔티움 제국령으로 귀속되었다.

6세기부터는 슬라브족이 자다르로 이주하면서 12세기 후반에 헝가리 왕국이 이 도시를 점령, 크로아티아-헝가리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2~13세기 세력이 강해진 베니스 공국이 자다르를 탐내면서 헝가리 왕과 끊임없이 싸워 결국 1409년 헝가리 왕은 다른 달마티아 지역과 함께 자다르를 베니스 공국에 팔았다.

동로마 비잔틴을 1453년에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발칸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하지만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안마당 격인 아드리아해 패권을 놓칠 수 없어 두 나라의 다툼이 오래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끊임없이 위협당하던 자다르는 계속된 터키의 공격으로 경제가 성장하지 않자 이를 막기 위해 도시에 성벽을 세웠고, 이후 터키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자 1805년의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멸망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라팔로 조약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인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국 사이의 평화 조약으로 유고슬라비아령이 되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는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근세에 들어서 1943년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구시가지의 반 이상이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으며 이후 재건축되었던 도시는 1991년 내전 발발로 다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광장의 건축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75%가 훼손된 데다

1991년 전쟁으로 또 한번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게시해놓고 있다.

다행히 광장 앞 성 도나트 성당은 큰 피해는 피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성당과 인근 건물들의 보수 전


자다르 관광

( 관광청- http://www.zadar.travel 혹은 https://www.zadar.hr/ )

자다르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이어져온 요새화 된 도시이고, 로마시대 광장 유적지가 최대 규모로 남아 있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들이 많은 도시이다. 이 후 베네치아 공화국 시대에 도시가 완성되어 고대로마의 고풍스러운 유적과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네스크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중세시대 로마 교황청의 직속 관리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들이 많았으며 슬라브 국가들의 상업, 문화의 중심지였다.

16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지은 3km 길이의 성벽에 싸인 구시가지는 엄지손가락처럼 삐죽 나온 작은 반도 모양이다. 당시에는 시티게이트라 불리는 4개의 성문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육지의 문(Mainland Gate)과 바다의 문(Port gate혹은 sea gate) 2개의 문이 남아 구시가지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자다르의 성벽은 2017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아래 사진들은 자다르 관광청 사이트 발췌)

구시가지(Zadar 관광청)
(Zadar 관광청)

이전 자다르 모습들

(Zadar 관광청)
(Zadar 관광청)

현재에도 크로아티아 중간 위치로 여러 도시를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자다르 버스 터미널에서는 크로아티아 국내 지역 이동 노선도 많고 자그레브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를 경유하여 약 15시간 걸리는 독일의 뮌헨행 매표소도 보인다.


자다르 숙소

버스 터미널에서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 경찰서까지는 2번, 4번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그러나 짐가방의 피로도를 고려, 도보 1.8km 거리를 택시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택시는 구시가지가 일방통행인지라,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아서 내려주었다. 덕분에 구시가지에 둘러쳐진 성벽을 둘러볼수 있었다.

현지어로 출력해간 바우처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며 숙소 찾기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이리저리 알아보지만 그 역시 주소만으로는 찾지를 못한다. 택시기사는 돌려보내고, 우리 둘이서 인터넷 지도와 숙소 출력물, 숙소 부근의 여러 장의 캡처 사진을 가지고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드물게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가 20세기에 지었다는 밝은 분홍색의 자다르 법원과 경찰서 건물 바로 옆 건물로 철문 굳게 닫힌 ‘ㄷ’ 자형 4층 빌라 건물이 숙소로 짐작되는데 들어갈수가 없다.

한참 헤매다가 마침 환경 미화원이 철문을 여는 틈을 타서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철문 지나니 중정이 나타나고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아! 그 건물 입구에 그토록 찾던 숙소 이름이 자그맣게 쓰여있다.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는 호스트의 메모와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다.

30년 경력(?)패키지 여행자로서 리셉션있는 호텔만 익숙한 내게 이런 숙소는 상상불가 상황이다.


전화를 받은 호스트가 금방 달려왔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에 호스트는 우리의 무거운 가방을 계단을 통해 4층까지 올려다 주었다.

원래 한 가구인 아파트를 거실, 발코니, 부엌은 공동사용 공간으로, 침실과 화장실을 별도로 2팀의 게스트가 묵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다른 사용자가 없어서 통째로 우리 차지가 된 ‘운수 좋은 날’이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ㄷ' 자형 아파트라 서로 바라다보인다. 부엌에서, 거실에서 베란다 의자에서 오후를 보내는 주민들, 마당에서는 는 아이들, 주차장에서 차를 손질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수목 무성한 공원 너머로 넘실거리는 바다의 푸른 색감이 확 시선을 잡아 끈다. 베란다에서 약 300m 거리쯤이다.


아까 우리가 숙소 찾을 때 친절을 보인 가게에서 사 온 피자로 점심을 때운다. 유별나게 맛 좋은 피자다.

서둘러 예의 육중한 철 대문을 나와 반들반들한 대리석 골목을 걸어 포럼 광장으로 나아간다.

숙소 바로 옆 분홍색 벽이 경찰서 건물. 그 앞에 차려진 야외식당
식재료까지 갖춰진 부엌
열린 베란다에서 보면 바다가 지척이다.


골목 끝에 성모님의 교회가 있다.

1752 년 9월 12일, 베네치아 군함에 보관된 병영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 도시 전체가 화마에 휩쓸릴 위험이 놓이게 되었다.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주민들이 Kaštel에서 성모님을 불러내 기도를 드렸는데 마침내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유래가 있는 성당이다. 그 오른쪽에 박물관이 있지만 오늘은 휴관일이다. 성당에 접하여 수도원도 있다고 한다.

교회 앞 광장이 바로 로마 포럼이다.

성모의 교회

마시대 포럼 (Forum)

성당앞에 펼쳐진 포마시대 포럼은 한눈에 봐도 로마에서나 봤음직한 석주의 장식물이나 각종 두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곳은 과거 로마시대 포럼으로, 집회장이나 시장으로 사용되었던 로마 특유의 장소다. BC 1세기 로마가 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운 것으로, 도시의 중심 광장으로 삼았던 곳이며 시민들이 토론을 한 장소라고도 한다. 주피터 주노오 미네르바 신에게 헌정되었던 神殿地라고도 한다.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목이 잘린 채, 혹은 형상이 일그러진 마모된 모습으로 놓여있는 석상들과 건물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면적이 90 x45미터로 아드리아해 동부해안에서 가장 큰 로마시대 광장이었다.

6세기 아이슬란드의 화산폭발로 도시가 파괴될때 무너진 이후 100년전까지만 해도 땅속에 묻혀 그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던 로마포럼이라고 한다.

중세시대에 무너진 돌들을 가져다 건축물 석대로 사용했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야 발굴을 시작했고 1970년대 복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비록 잔해로 남아있기는 해도 현재 남아있는 로마시대 포럼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2천여 년의 세월을 견뎌냈다니 어느 곳의 유물보다도 더 마음을 끌어당긴다.


로마 포럼 발굴터 그리고 오른쪽 두번째 건물이 박물관
광장 건너편 성 도나투스 성당

아래 옛 사진을 보자면,

성 아나스타샤 종루와 그 앞 도나트 성당 둥근 지붕으로 추측컨대, 분수가 있는 광장은 현재의 로마포럼이 자리가 아닐른지?

사진 속 건물들은 아마 전쟁때 파괴되었던 건지 찾아지지 않고 , 지금의 광장은1930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로마포럼의 복원 중 현장으로 자리한것 같다.

(Zadar)

수치의 기둥

포럼 서쪽엔 높은 담과 기둥이 서 있다.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란다.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이 아닌 제우스, 헤라, 아테네 신을 모시던 그곳을 완전하게 없애는 대신, 중세시대 자다르인들은 이 기둥에 죄지은 사람을 세워두고 수치를 느끼게 벌주었던 수치 기둥(Pillar of shame, Stup seama)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을 듣는 관광객들이 진지하게 기둥을 쳐다보며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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