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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15.자다르3 :자다르성벽, 바다문, 바다오르간

태양에게 인사, 자다르 대학과 육지 문, 5개의 우물광장을 지나며

by yo Lee

나로드니 광장에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성벽 아래 굴다리와 신시가지로 건너가는 다리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좌회전하면 페리터미널이 나타난다.

인근 수많은 섬과 이탈리아로 가는 선박 터미널이다.

바다에서 자주 보이는 크로아티아 선적회사 JADARO LINE 여객선이 건너편 이탈리아의 앙코나 항로를 오간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이탈리아로 가서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으로 오는 바닷길 경로이기도 하다.



(3천년 역사를 가진 이 도시, 자다르 관광청 안내글이다.)

지금과 같은 도시는 로마시대에 벌써 만들어 졌다. 케사르시대에 요새화 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성벽과 탑 그리고 출입문들을 내륙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만들었다. 도시의 서쪽부분은 집회장소(Forum)이며 바실리카 성당과 수도원이 있는 사원이 있다. 도시 성벽 밖에는 원형경기장과 묘지가 있다. Vransk호수로부터 물을 끌어오던 수로교는 일부분 남아있다. 고대도시 안쪽은 일련의 교회와 수도원이 만들어질 때 중세도시로 발전 됐다. 중세 때 자다르는 완전한 도시 면모를 갖춘 곳이었으며 지금도 그런 모습이 남아있다.


16세기엔 베니스인들이 내륙쪽을 향하는 도시방어벽을 새로 만들었다. 새로운 방어벽 시스템으로 오각형 모양의 요새를 보강 했고 또 다른 도시를 이 고대도시 바로 앞쪽에 건설 했다. 동시에 공공 물탱크 3개를 만들었다. 16세기 전반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그 시기에 성모 마리아 성당을 개조 했다.

17-18세기에 성벽과 탑 사이에 방어용 참호(Fosa)를 팠었으나 이탈리아 지배 시절에 완전히 묻어 버렸다.

2차세계 대전 때는 폭격으로 인하여 모든 도시가 파괴 되었고 일부분만을 복구 하였다. 비록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도시의 요새가 파괴 되었지만 성벽은 항구와 도시를 따라 서있으며 지금은 그 당시 주춧돌들과 도시 전체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북쪽 성벽(goole)
남쪽 성벽 (Zadar)

9. '바다의 문' 그리고 오스만 대 베네치아의 전쟁사

페리 터미널에서 구시가지로 들어올때 거치는 문이 '바다의 문'이다.

고대로마 제국 개선문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바다의 문’은 1573년에 지어졌다. Chrysogonus의 문이라고도 하며 자다르 출신의 로마 시민 멜리아 아니아나 (Melia Aniana)가 남편을 기리고 오스만 제국 군대에 대한 기독교 군대의 '레판토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문에는 베네치아를 비롯 여러나라로 결성된 신성동맹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찌기 십자군에게, 베네치아는 자국의 지중해 장악을 위한 교두보로 찜한 도시 자다르( 당시 이름은 '자라')를 빼앗아주면, 원정을 위해 자국에 머문 체류비를 탕감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1202년 4차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인 콘스탄티노플을 초토화시켜 수많은 재물과 문화유적을 파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베네치아는 자라를 얻었고, 이어 아드리아해 연안의 항구들을 차례로 차지하며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 막강하게 국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이 일로 비잔틴은 1453년 오스만에게 패망하는 사양길에 놓이게 된다.


점차 강성해진 오스만은 유럽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기독교 국가들은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과 대치한다.

15세기부터 이어진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결정적 승패를 내지 못하다가,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힌 전투가 레판토 해전이다.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포함한) 스페인 왕국과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연합한 동맹국

갤리선 함대가 레판토에서 승전보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간주한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전투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와 오스만,

두 나라의 치열한 힘겨루기 과정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15세기에서 17세기 아드리아해를 장악한 해상력과 무역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지역방어를 위해 크로아티아, 이탈리아와 몬테네그로 등의 여러 곳에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중 베르가모의 요새도시, 페스키에라 댈 가르다 요새도시, 코토르 시베티크의 성 니콜라스 요새, 그리고 자다르 6곳이 201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특히 자다르 여기 저기에서 볼수 있는 날개달린 사자상은 이런 베네치아 역사의 증거물인 셈이다.


레판토 해전을 일부 역사가들은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긴다고도 한다.

즉, 기독교국 동맹이 이슬람국인 오스만을 물리친 것에 의미를 두며, 팽창일로에 있던 오스만의 해상장악력이 점차 힘을 잃는 전환점이 되는 점에 의미를 둔다.


(풀라의 세르기우스 문에서 살펴본 바,

레판토 해전으로부터 약1600년 전의 악티움 해전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 연합군에 맞서 후에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와의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기선을 잡은 가이우스는 안토니오의 우세한 군사력 보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가서 후에 삼두정치를 끝내고 황제로 등극하 로마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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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근, 현세 이르기까지

전쟁 속성이란게 명분과는 괴리가 있다.

십자군 전쟁만 해도

종교가 아닌 정치적 목적이 근간이었고,

진정한 기독교 수호나 성지 탈환 명분

사실 상

갓 터잡아 자라나기 시작한 서유럽 의 세 확장과,

그 틈새에 낀 교황 위기 타개

혹은 이들 상호간 경제적 실익 더 비중있는 경이었음을 근래에 알게되었다.


따라서 대의명분 동떨어진 만행의 흑역사가 십자군 전쟁 중 곳곳에 점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배운 세계사는 사건 해석이 흑백논리로 매우 simple 했다. )

십자군의 진정한 신앙심 발로는

더러 최일선의 순수한린 병사 가슴 속에나 자리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그리고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신앙, 자유수호, 민주주의 혹은 민족주의 등,

이념의 깃발을 쥐어주며

전쟁터의 재물로 산화해가도록 하고 있다.


때때로

깊이 없는 정치적 철학이나 민생에 대한 깊은 통찰없는,

단지 야망 가진 사람들이 만든 정치라는 쟝를 통해

민생과 국민들의 생명

망망대해 큰 물결에 내던져버린 사건결과로 끊임없이 생산되는것이

역사의 숙명적 특성인걸까?

바다의 문
페리 터미널
바다의 문과 성벽(goole): 구시가지에서 바라본 모습
바다 건너가 자다르 신시가지
자다르 선착장 근처 예전 모습(Zadar)

10. 성 크리소고노 성당: (St. Chrysogonus Church/ Crkva sv. Krševana)

바다의 문 가까이에 있는 성 크리소고노 성당은 12세기에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크리소고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도 박해를 받은 고대 로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로 자다르 수호성인이다.

로마시대의 시장과 6세기의 은둔자 성 안토니 교회 부지에 세워졌던 교회는 나중에 개조 및 확대되었다.

1175년에 자다르 대주교 람페리 디우스(Lampridius)에 의해 봉헌되었다.

중세에는 큰 남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지만 오늘날 남은 유일한 부분이 이곳이다.

1387년, 크로아티아-헝가리의 여왕 인 Jelena Kotromanić는 이 교회에 묻혔다가 나중에 세케 슈페 헤르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성 아나스타샤의 대성당과 함께 이 교회는 달마티아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성당 앞에는 크로아티아의 작가 페타르 조라니치(Petar Zoranic) 의 동상이 서있고, 그 앞에 도시 박물관 (Muzej grada/ The City Museum)이 있다.

(Zadar)
(Zadar)

바다의 문에서 시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아주 작은 성당이 있어 들어가 본다.


세인트 앤드류 성당과 성 베드로 성당

세인트 앤드류 성당과 성 베드로 성당은 이중성당의 예이다.

그들은 연결된 성당으로서 시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성 앤드류 성당은 이전 로마 건물의 자리에 세워졌으며 성당의 남쪽 벽과 후진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앤드류 성당은 12 세기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진 단일 회중석 성당이었다.

세인트 앤드류 성당의 후진 뒤에 성 베드로 성당이 있다.

이 베드로 성당은 처음에 오라 토리엄으로 사용되었었으며 이 오라토리엄은 자다르 대성당의 오라 토리엄과 함께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로마네스크 시대에 들어와서 성당은 이중 회중석 교회로 바뀌었다.

※nave: 신랑(身廊, Nave, 네이브) 또는 중랑(中廊)은 교회(성당) 건축에서 중앙 회랑에 해당하는 중심부로서 교회 내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넓은 부분이다.
보통 긴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예배자를 위한 회중석을 말한다.
single nave는 성당에서 제단을 향한 회중석이 한 공간만 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어떤 성당들은 제대와 메인 회중석 사이를 가르지르는 또 다른 회중석, 익랑이 있거나 (이때 회중석은 위에서 보면 십자형을 이룬다.) 측면에 기둥이 있어 기둥 밖 혹은 옆의 복도가 있는 측랑을 둔 성당과 비교되는 용어이다. 유럽의 큰 성당들은 이 모든 구조를 다 가지고 있는 성당도 종종 보았다.

※후진(apse)는 성당에 들어서면 보이는 중앙의 맨 안쪽 공간이며 제대 혹은 유물들이 놓이는 공간이다.
다음 편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현재는 기념품과 그림을 파는 갤러리가 되어 있다. 선물용으로 가벼운 몇 가지 액세서리를 집어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선다.

(Zadar)
(Zadar)
가게를 열고 있는 성당의 nave 자리.(Zadar)


바다 오르간

해 질때가 되어서 일몰과 바다 오르간, '태양에 인사'를 보러 북서쪽으로 향해간다.

제부도 바다에 빠져들어가는 잘 익은 홍시 빛의 세수대야만한 해,

곰소항에서 부터 서해안 길에 줄곧 동반해주는 해,

한강 다리 너머로 넘어가는 서울 해와는

이것의 일몰은 어떻게 다를지...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마침 바다로 서서히 빠져드는 해를 바라보며 우리도 계단에 자리를 잡는다.

단체관광객을 비롯한 많은 여행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다. 그들 얼굴이 장밋빛으로 물들고 있다.


바다 오르간(Morske Orgulje)은 도나트 성당만큼이나 자다르의 상징적 장소로 등극해서 여행안내 책자나 많은 유튜브 영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2005년 세계 최초로 크로아티아 출신 천재 설치미술가인 니콜라 바시츠가 바닷가에 만들어놓은 곳이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대리석 계단 아래 75m 길이에 걸쳐 길이가 다른 35개의 파이프를 설치, 파도가 파이프 안의 공기를 밀어내며 각각 다른 소리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파도의 세기나 속도에 그리고 썰물과 밀물에 따라 달라진다는 소리는 변화무쌍해서 듣고 있으면 약간 신비함마저 느껴진다. 평소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주파수의 소리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므로 바다오르간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라기보다는, 아드리아해 저 멀리 구석구석을 적시던 바닷물이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의 곡조를 물살에 싣고 밀려와 깊은 숨으로 토해내는 거라고 느낀다.

머언 수평선 너머 점점이 흩어진 섬과 아스라이 그 너머의 다른 나라 연안을 바라보자니 드는 생각이다.

공명되는 파도 소리에 삶의 이력을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퍼져난다.

피곤해진 발걸음 멈춰선 지금처럼,

내 삶의 여정도

'천천히, 더디게, 두루 고루 적시며 흘러가자'는 希願

실어본다.


계단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서고, 앉고 더러는 비스듬히 누워 일몰 풍경에 집중한다.

저마다의 걸음을 멈추어 선 이들도, 나처럼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고 있는건지...


붉은 장미꽃물을 유감없이 바다에 흩뿌리며 수평선 너머로 잠겨드는 해와,

그 꽃물을 넘치게 담고 있는 자다르의 앞바다,

그 물 아래를 훑으며 파이프를 울려 읊조리는 바다오르간,

그리고 한곳을 바라보는 이 자리 모든 이의 마음들이

커다란 한덩이 기운으로 응집되고 있을 이 광경이,

내게 각인된다.

계단 아래쪽이 바다 오르간 설치부분
바다 오르간(Zadar)

‘태양에게 인사( Pozdrav Suncu)’

해는 지고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태양에게 인사( Pozdrav Suncu)’라는 테마로 태양열이 만들어낸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아직 해의 잔영이 조금 남아 있어서 화려한 빛을 볼 수 없으나 많은 젊은이들이 살짝 비추기 시작하는 유리판 빛 위에서 뛰어오르는 동작 연출로 실루엣 사진을 찍고 있다.

역시 니콜라 바시츠 작품으로 지름 22m의 원 모양의 돌로 포장 된 물가와 같은 높이에 배치 된 300 개의 다층 유리판으로 구성된다. 둥근 원형 유리 도체 아래에는 태양열 전지판과 발광 다이오드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낮 동안 저장한 태양에너지가 해가 지면 발광 다이오드를 통해 빛으로 변한다. 색색으로 달아오르는 원형의 판 위에서 관광객들은 여전히 팔짝거리며 신이 나있다.

여기 저기 눈에 띄는 단체여행객 한국인들도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태양광 충전이 여의치 않은 날엔 변화가 있을까?


서서히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발광 다이오드
중간 둥근 부분이 '태양에 인사'(Zadar)
발광 다이오드 깔린 밑면(Zadar)

우리는 조금 일찍 빠져나와서 아까의 바다의 문 근처 시장과 마켙을 향해 걷는다.

현지의 싱싱한 식재료를 구입해서 좋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새벽의 자다르

이른 새벽의 자다르를 보기 위해 아직 어둑할 때 숙소를 나왔다. 바다는 아직 밤의 그늘에 묻혀 짙은 청회색빛을 띠고 있다. 해변가 리바를 따라 자다르 대학 쪽으로 향한다.


자다르 대학과 육지의 문

관리원이 대학교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다.

자다르 대학교는 1396년 도미니크회 수사들에 의해 설립된 크로아티아 최초의 대학이다.

크로아티아어로 된 신문이 처음 발행된 도시란 점에서도 시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아주 강하다.

유서 깊은 이 대학교는 건물이 매우 아름답고 정결해 보였다. 자다르대학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이끈 독립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 프란요 투즈만 (Franjo Tudman)이라고 한다.

커다란 캠퍼스가 아니어도 대학교는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며 인재를 발굴, 육성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학들 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자다르가 달마티아지역 문화국가재건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는데 그 중심에 이 학교의 역할이 상당했었으리라.


자다르 대학교


스피리돈 브루시나(Spiridon Brusina:1845-1909 )의 동상

대학교 앞에는 바다를 향한 동상이 있는데 스피리돈 브루 시나(Spiridon Brusina)라는 동물학자의 상이라고 한다.

그는 1845 년 12 월 11 일 자다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비엔나에서 자연 과학을 전공했다 .

연체동물과 멸종 된 연체 동물, 조류 및 포유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지상, 담수 및 해양 연체동물 컬렉션과 특정 신유전자 등 수많은 논문을 썼다.

또한

아드리아 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를 수행,

해양 생물 과학 연구소 설립을 주장했고,

Oton Kučera 및 Gjuro Pilar와 함께 1885 년 말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자연 과학 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많은 박물관 소장품, 특히 malacological 및 조류학을 설립하고 편집하여 귀중한 도서관을 만들었으며 그가 재직하던 자그레브 동물원은 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박물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몇 안 되는 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19 세기에 '바다 깊은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연구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1868 년 7월 1일 자다르에서 그가 도시 항구에서 해저 탐험를 시작함으로서, 그 날짜를 크로아티아 해양 생물학 탄생일로 간주한다.(위키피디아)


스피리돈 부루시나 상과 그의 연대 표시 기둥

육지의 문 (Kopnena vrata, Land Gate)

자다르대학을 지나 성벽을 끼고 있는 해안가를 걸으면 높다란 성벽을 끼고 걷는 좁은 해변로가 나타나는데, 그 길 끝에 구시가로 들어가는 육지 문이 있다.

이 성벽의 문은 구시가지 밖을 향해 지어진 것이라서 안쪽의 문에는 장식이 없다. 나중에 건너편에 새로운 도시를 지었다고 한다.

1543년에 건축된 육지의 문은 해수면보다 높이 지어졌으며 자다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로 불린다.

문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와 말을 탄 크리소고노, 두 남자 얼굴, 베네치아 공화국 문장, 그 밖의 여러 장식이 새겨져 있다.

승리를 상징하는 3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로 마차가 다니고 양 옆 문으로는 사람이 다녔었다고 한다.

여전히 구시가 연결 메인 입구로 사용된다.


자다르를 탐내어 제4차 십자군 전쟁협조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던 이 도시의 베네치아 입성은 굳건한 성벽과 성문에 새겨진 날개 달린 사자 상 즉 성 마르코의 조각물을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물러간지 오래여도 여전히 통치국으로서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성벽에 새겨진 조각
과거에 뿌리내린 현세의 야생화
예전의 육지문과 성벽(Zadar)
(goole)
자디르 대학쪽을 에워싼 성벽(Zadar)
왼쪽 중간에서, 가로지른 성벽과 그 안쪽의 자다르 대학 (Zadar)
육지문 야경(Zadar)
성벽 야경(Zadar)
육지문을 통해 구시가지를 바라본 모습(Zadar)
상단 건물, 돔 부근이 자다르 대학. 감싸며 육지문으로 뻗은 성벽 (Zadar)

걸음을 되돌려 바닷가로 다시 나온다.

새벽의 보라빛을 거둬낸 햇살이 찬란하게 떠오르며 또 하루를 여는 중이다.

제 빛깔 되찾은 바다 가장자리에서 바다 오르간은 밤 새 쉬지 않았을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

어제 거리와 공원과 앞 바다에 디자인화 된 여러 조형물들이 새벽 공기에 vivid한 색감을 자랑하며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행사를 준비하는 여러 소품들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개장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아침시간의 바다는 또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오늘은 또 어디로부터 먼 길 마다 않고 찾아든, 어떤 손님들을 맞을까?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우리는 10시 출발 버스를 타러 버스터미널을 향해 간다.

숙소만 나서면 만나게 되는 푸른 바다와 오래된 포도를 지닌 역사적인 건물들과 그리고 맑은 햇볕을 간직한 리바거리를 두루 음미하며 천천히 육지의 문 쪽으로 향해 걷는다.

그래도 아름다운 골목길에 미련이 남아서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우리 둘의 사진을 부탁한다.


5개의 우물 광장과 옐레나 마디옙카 여왕공원

가다가 5개의 우물을 지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족이 침략했을 때를 대비해서 성벽봉쇄 시에 식수확보목적으로 베네치아 인들이 만들었던 우물이다.

요즘 우물 광장은 여름마다 주요콘서트 장소로 사용된다고.

광장을 지나 구시가지의 입구인 ‘육지의 문’을 지나면 크로아티아 최초의 공공공원이라는 옐레나 마디옙카 여왕공원 (Perivoj kraljice Jelene Madijevke/ Queen Jelena Madijevka Park)이 나타난다.

원래는 16세기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 그리마니 요새(Bastion Grimani)로 자다르 구시가의 동남쪽을 방어하는 곳이었다. 19세기에 군사적 기능을 잃고 공원이 되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기도 하다.

엘레나 여왕은 10세기, 크로아티아 왕이었던 남편 미하일 크레쉬미르 2세 사후에 아들을 대신해 크로아티아를 다스렸던 여왕이다.

이 공원을 돌아볼 시간은 없으니 먼발치서 바라보다, 공원을 끼고 걸어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Zadar)
우물 광장 (Za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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