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우리의 삶

만든 놈, 배낀 놈, 소비한 놈

잘 배끼는 놈만 살아남나

by 춘삼


영혼 없는 복제의 시대가 도래했다. 싸구려 인스턴트 재미와 감동이 식상한 요즘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양산형 숏폼이 지천으로 널렸고, 작자미상의 예쁘장한 글귀와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어 온라인 구천을 떠돈다. 창작의 진정성은 시대의 소음 속에 묻혔다. 불특정 다수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지만 원작자는 모른다. 디지털 시대의 도적질이 따로 없다.


올 초 카카오톡을 비롯한 SNS에 너도나도 AI로 찍어낸 '지브리풍' 그림체가 범람했고, 심지어 당근마켓에는 그걸 돈 받고 파는, 양심 로그아웃한 디지털 봉이 김선달들까지 등장했다. 그들 중 미야자키 하야오가 집요하게 인생을 갈아 넣은 공력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나 할까. 그게 역겹다. 손쉽게 껍데기만 가져다 쓰고 철학은 온데간데없다. 남들 다 하는 도둑질은 도둑질도 아니라는 듯이.


나는 불법 웹하드의 역사와 함께 자랐다. 소리바다, 당나귀, 프루나, 파일구리가 창궐했던 시절, 우리는 저작권의 법적 회색지대 속에 있었다. 스치는 은은한 죄책감 속에서 전 국민이 합의된 듯 당연하게 불법을 소비했다. 부끄럽게도 인생 첫 불법 다운로드를 시도했던 중 1 무렵이었다. 민달팽이보다 느리게 움직이던 로딩 바를 반나절 넘게 기다린 끝에 곰플레이어로 재생한 신작은 'cam 버전'이었다. 칠흑 같은 극장 안 명멸하는 스크린 불빛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게 뭐람. 나는 창을 끄고 파일을 삭제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불법 영화 다운로드였고, 그날 영화는 못 봤지만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MP3 대중화로 음반이 디지털 음원으로 대체되던 격변의 시기에 나는 한창 음악에 심취한 사춘기였다. 그때 음원은 공기와 같은 존재로, 저작권 인식 자체가 없었다.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었다. 대충 검색만 하면 최신곡 무료 다운로드 링크가 넘쳤고, 클릭 한 번으로 내 것이 되었다. 뭐든 첫 패치가 중요한데 온 국민이 음원은 공짜라고 학습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첫 음원 유료화 소식에 분노로 들끓던 댓글 창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돈을 내느니 차라리 듣지 않겠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사람들은 몰랐다. 애초에 공짜가 아니고 불법이었다는 것을.


다행히 시간이 흐른 지금은 창작자에게 수익이 돌아가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하지만 '예술은 공짜여야 한다'라는 출처 모를 도둑놈 심보가 처음부터 우리 안에 깊숙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2025년 현재에도 넷플릭스를 어둠의 경로로 이용하는 이들, 토렌트로 영화를 다운받고 공유하는 이들, 음원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세상 곳곳에 평범히 존재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무언가는 누군가가 방망이 깎듯 평생 붙들고 다듬어온 인생의 조각일텐데, 우리는 오직 편리하게 위로와 낙을 얻되 창작의 수고로움은 모르거나 모르고 싶을 뿐이다. 외면과 무지는 참 평범하고도 강력한 죄악이다. 그 죗값은 결국 다 함께 치르게 되어있다.



그렇게 '불펌' 콘텐츠가 질병처럼 번지는 오늘을 살아간다. 원출처가 지워진 채 얼레벌레 자막과 음원을 입고 무한히 재생산되는 온라인 공해가 세상에 가득하다. 병든 세상에는 더 이상 창작을 향한 열정과 존중이 없고, 남는 것은 무임승차가 익숙한 도둑놈들과 무수한 보통의 방관자들뿐일 것이다. 느슨한 저작권 인식과 소비는 결국 창작자에 대한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 된다. 가장 양심적인 창작자들이 이 진창에서 퇴장당하고야 만다.



예술은 공짜가 아니다. 저작권은 허울이 아니다. 법의 문제 이전에 인간에게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한 톨 양심이다. 고유하게 반짝이는 창작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비추어왔지만 이제는 복제, 무심, 피로에 잠식당한다. 메아리치는 망령 같은 모방 콘텐츠의 홍수에 충실한 창작은 밀려나고 우리는 공해 속 새로운 빈곤을 마주한다. 저작권 불감증 사회에서 창조혼은 빛을 내기도 전에 꺾이고 남의 땔감이 되고 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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