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끼고 살아주세요. 제발.
(공공장소에서) (또) 악마를 보았다.
현충일 저녁, 수인분당선에서 ‘요즘 애들은 타인을 NPC 취급한다’는 말을 절감했다.
한티역 집으로 가는 길, 압구정로데오 쯤에서 중학생 남자애들 넷이 열차에 탔고, 자기들 몸보다 큰 삐까뻔쩍한 자전거 네 대를 출입문 앞에 세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요란하게 허벅지 때리기 게임을 시작하더니 "시발", "병신", "니 애미" 로 점철된 고성방가로 이어졌다.
그들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보다 못해 “자전거가 문을 막고 있으니 중간으로 옮겨 달라”고 좋게 말했지만 예상대로 들은 체 만 체 했고, 오히려 더 시끄럽게 더 험한 것들을 입으로 배설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통탄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원래 남자놈들이 아무리 거칠고 친구끼리 욕지거리를 일삼는다 해도, 서로의 ‘엄마’는 건드리지 않는 게 ‘국룰’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 금기마저 무너진 지 오래다. 요즘 학교 교실에서 남학생들 입에는 서로의 엄마 실명이 공공연히 오르내린다. 죄없는 같은 반 아이들도 남의 집 엄마 이름을 매일 들어 알고 있는 지경이다. 선을 넘다 못해 선이 사라진 학교다.
대체 저들의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과연 어떻게 키운 것인가? 비싼 스투시 티셔츠와 자전거를 사주면서 부모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자녀의 저런 모습을 알까? ...아니면 저 아이들도 집에서만큼은 착한 아들들일까? 진심 궁금했다. 경찰에 신고하고, 보호자를 부르고, 증언하는 상상을 했다. 저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게 당신들의 아들들이다’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한마디 하려다 참고 일단 지하철 공사에 문자로 민원을 넣었다. 자전거 네 대가 출입문을 막고 있고, 동일 인물들에 의한 고성방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기관사 아저씨의 안내방송이 나왔고, 그나마도 후자는 완전히 생략되었다. ‘자전거가 출입문을 막고 있다는 민원이 들어왔으니 자전거를 옮겨달라’는 안내방송이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일어나 자전거를 옮기면서도 들으라는 듯이 욕설과 막말을 계속했다. “누가 신고했는지 신상 알고 싶다.” “개지랄.”등.
나는 참으로 부끄럽고 무력한 어른이었다. 만일 동행 없이 나 혼자였더라면 나는 훈육과 계도를 시도했을 테고, 그래서 안 되면 경찰도 불렀을 것이다. 저들로 인해 학교생활을 괴로워하는 우리 착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기어이 끝까지 갔을테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아무 것도 못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훈육에 대한 오개념이 있다. 훈육은 마치 부모만, 교사만 하는 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는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 위험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 누구든간에 그 자리에 있는 어른이 즉시 훈육을 하는 거다. 슬프게도 나 포함 그 칸에 있던 어른들 모두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기' 외에는 아무 대처도 못했다. 바로 근처에 중학생 아들과 타고 있던 부모 조차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열차에서 내려서도 한동안 나 자신에게 무력감과 절망을 느꼈고 오늘까지 잠을 설쳤다.
악은 흔하고 평범하다. 악마들은 도처에 있다. 우리도 이미 악의 평범성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학교 교실에서도 악마들은 자라고 있으며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들과 함께 학교생활하느라 힘들어하고 우울해하는 우리 아이들이 많다. 미안하고,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다. 학교에서, 세상에서 이 악마들이 목소리가 커지고 힘의 싸움에서 기세등등해질수록 결국 착한 아이들만 고통받고 작아지고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건 금쪽이들이 아니라 이 멀쩡하고 착한 아이들인 것이다.
우리 제자들의 증언과 하소연으로는, 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대놓고 일베용어를 쓰고 혐오와 비하의 워딩을 남발해도 교사들은 못 들은 척 하거나 심지어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넘어간다고 한다. 죄없는 아이들만 참고 상처받으며 속병이 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이렇게 무지와 무책임으로 손을 놓는다면, 한 교실 쓰면서 가장 고통받는 피해자는 결국, 다시 말하지만, 가장 선한 아이들이다. 악마들과 함께 자라날, 같은 세상을 살아갈 이 아이들이 가장 가엾은 것이다. 학부모 수준, 면학 분위기가 가장 좋다고 알려진 이 곳 학군지조차 이 모양이다. 다음세대를 길러내는 건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나는 공중도덕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의 부모가 궁금하고, 방관한 어른들이 답답하고, 끝내 아무 것도 못하고 내린 나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난다.
부모들은 한 때 아이였으면서, 아이들의 세계를 너무 모른다. 나는 애 낳을 생각이 없다. 양육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현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이 없다. 만약 낳는다고 해도 특히 아들은, 이런 세상에서 잘 키울 자신이 정말 1도 없다. 그래서 안 낳는다는 거다. 가정에서 애들을 잘 키우고 조심한다고 해도, 나쁜 것일수록 쉽게 학습하고 병든 것일수록 강력하게 정신에 달라붙는다. 또래 남아 집단 속에서, 스마트폰 작은 화면 속에서,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빨아들인다. 부모들은 자녀세대에 대한 무지, 내 자녀에 대한 무지로 인해 현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아이 눈치 보느라 모르는 척 한다.
관심 없고 지도력 없는 부모는 부모 자격이 없다. “우리 애는 안 그래요” 소용 없는 말이다. 당신만 모르는 일일 수도 있다. 설마 내 아이가 '방 안에 있으니', '학교에 가 있으니', '학원에 보내놓았으니', 그 시간엔 안전할거라고 생각하는가? 착각하지 마라. 어려서 스마트폰부터 쥐어준 대가로 자녀는 괴물이 된다. 당신의 자녀가 세상에 나가서 존재 그 자체가 테러가 될 수 있다. 피할 수도, 그렇다고 더불어 살 수도 없는 존재로 자라날 수 있다.
‘마음읽기’ 개념도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잘못 적용하는 부모들에게 부모 자격이 있는가? '권위적인 부모'와 '부모의 권위'도 구분하지 못해 가정에서 서열도 가르치지 않고 세상의 규칙도 가르치지 않는 부모가 대체 부모인가? 내 아이의 사회성 부재를 아직도 코로나 탓하는 부모는 부모노릇을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잘못 키운 아이들은 학폭러, 가해자가 되며, 착하게 키운 아이들은 우울증을 얻고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출산율을 운운할 수 있는가? 책임지지 못할거면 낳지 말고 낳았으면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
아들 키우는 부모라면,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을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남의 집 이야기,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감이지만 언제든 내 이야기, 우리 아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 괴물들을 길러내고,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건,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어른들이다. 어른이라면 아무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1차적인 책임은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아닌, 부모에게 있다.
괴물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괴물은 어른들이 낳고, 기르고, 만들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