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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모호 Feb 26. 2020

수영을 시작했다.

맥주병에서 수린이로의 도약

회사에서 KPI를 달성하면 하와이를 가기로 했고, 나름 극적으로 KPI는 달성하여 그 이듬해에직원 전체가 하와이를 가게 되었다.

여러 액티비티들을 계획했고, 그 중엔 서핑이 있었다. 겨울 스포츠로 스노우보드를 즐기는 나는 탈 것의 생김새가 비슷한 서핑을 금방 배워내서 재밌게 즐길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현지에서 하루 강습을 받고, 이 후에는 서핑 보드를 렌탈해서 함께 간 분들과 적당한 포인트를 찾아 자유롭게 서핑을 하기로 했다.

파도도 크지 않고 수심도 얕아서 강습할 땐 물에 대한 공포는 없었지만, 강습이 끝날 즈음 작은 사고가 났다. 나를 기준으로 해변쪽에 있던 강사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부른 게 맞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뒤를 돌아봤는데 그 순간 파도가 치면서 서핑 보드가 갈비뼈를 쳤다. 충격을 잠깐동안 숨을 쉬지 못했고 통증은 가라앉는 듯 하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아파오더니, 다음 날엔 숨 쉴 때마다 계속해서 통증이 있었다.


나의 부상과는 상관없이-아프긴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일행과 서핑을 하러 갔는데, 문제는 갈비뼈가 아니었다. 발목이 서핑보드에 리시로 매여있긴 하지만, 발이 닿지 않는 깊이에서 공포감이 밀려왔다. 서툰 테이크오프로 몇 번 빠지고 두려움이 누적되다 보니 도무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갈비뼈 부상으로 패들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너무 아프고 무서워진 탓에 이내 그만 두고 뭍으로 돌아왔다.


'돌아가면 수영 꼭 배워야지.'

여러 악재(?)로 제대로 즐기지 못한 서핑을 나중에라도 하고 싶어서 그 전에 수영부터 해야겠다 다짐했다. 그게 2019년 3월 말 쯤. 하지만 해외여행 가면 늘 "돌아가면 꼭 영어 공부해야지"라고 다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수영 배워야지" 했던 생각은 다시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후 정기 건강 검진을 받게 되어 검진 전 쓰게 되는 문진표에서 "하루에 숨이 차도록 운동을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같은 질문에 "0분"에 체크를 하며 운동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수영해야지'라고 망각했던 다짐을 꺼냈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넣어뒀는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8월 말, 덜컥 동네에 있는 문화체육센터의 수영 강습에 등록해버렸다.


수영장과 수영 강습 등에 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나는, 9월 1일부터 시작해야지 하고는 8월 31일에 수영장을 찾았다. 나중에서야 안거지만 강습 신청은 대학교 수강 신청과 비슷하게 부지런하고 빠르게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걸 하루 전날에 신청하겠다고 간 것이다(...)

이왕 강습 받기로 한 거 매일 반(월, 화, 수, 목, 금)으로 시간대는 야근이나 약속을 고려하면 저녁은 자주 빠지게 될 것 같아 아침 7시 수업을 하려고 했는데 7시 수업은 매진. 다음 달에 다시 도전하자니 그대로 차일피일 미루게 될 것 같아 비어있는 6시 수업을 등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섯 시 수업을 계속 가고 있다.


바닷물에서 조차 뜨는 방법을 몰랐던 내가 어느덧 수영 6개월차의 수린이가 되었다. 어린이 풀에서 발차기를 하며 걷는 것부터 시작해서 물에 뜨기, 발차기, 자유형과 숨쉬기.. 그리고 지금은 어설프지만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조금씩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쯤 되니 서핑은 크게 생각이 없고 오로지 수영을 위한 수영을 하고 있다. 수영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다른 회사로 이직을 위해 면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결과적으론 그대로 머물러 있다) 지금 사무실은 판교에 있고, 그 회사는 여의도에 있다. 뚜벅이인 나는 대중교통으로 오랜 시간을 출근하는 것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보통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편인데, 지도에서 수영장이 근처에 있는 집을 찾고 있었으니 얼마나 수영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 규칙적인 운동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졌고, 생활 패턴도 완전히 바뀌었다.

보통 새벽 2시 쯤 잠을 자고, 일어나서 출근을 준비하는 딱 그만큼만 먼저 일어나서 준비하고(심지어는 그마저도 늦어 지각이 잦았지만) 아침의 여유랄 게 없이 출근했는데, 수영 강습을 6시에 받게 되면서 수업을 마치고 샤워까지 하고 나와도 7시 30분 정도가 되어 나의 아침과 출근 사이에 여유라는 게 생겼다. 무려 아침을 먹기도 하고 시차 출근으로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기도 한다. 수영 강습이 이른 만큼 11시 정도에는 잠을 청한다.

올빼미형이 좋냐, 아침형이 좋냐는 건강을 제외하고는 조삼모사의 느낌이지만 지각을 밥먹듯 하던 때의 긴장감과 죄책감은 사라지고 아침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운동이나 취미가 있겠지만 수영에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 쯤은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도 내가 이렇게 수영에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수영을 하는 동안은 나를 위한 시간이고 내 몸을 돌아보고 피드백하고 몰입하게 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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