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인생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다시 걷고, 다시 말하며, 다시 숨을 쉰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생존은 언제나 기적 같지만, 동시에 견뎌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치료의 시간은 단지 육체의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시간은 통증과 두려움, 외로움과 맞서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며 그 안에서 생명은 묵묵히 견디며 버텨낸다.
요양병원에는 대부분의 시간이 누워 있는 분들이 많다. 식사를 혼자 하시기 어려운 분, 체위를 자주 바꿔드려야 하는 분, 혼잣말을 반복하거나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분도 있다. 대부분 연세가 많으시고,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다. 자신의 상태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대신, 표정이나 몸짓으로 말하신다.
간호사는 정해진 시간마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필요한 처치를 한다. 가래를 흡인하는 동안 환자분은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움찔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늘 “금방 끝나요, 조금만요. 미안해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늘 의문이다. 내가 직접 그 불편함을 겪지 않는 이상, 그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단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조금 더 빨리 지나가기를, 그 순간을 덜 힘들게 지나가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간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때로는 너무 제한적이라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밤이 되면 병동은 고요해진다.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기계의 경고음을 주의 깊게 듣고, 산소포화도 수치를 확인하며, 약물 투여 시간을 체크한다. 그리고 한 병실씩 돌아보며 숨소리를 듣는다. 그 숨소리가 평소보다 약하게 들리거나 이상이 감지되면 더 가까이 다가가 다시 확인한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감각을 곤두세운다.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이렇게 세심하고 반복적인 관찰과 대응 속에서 이루어진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일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살아 있는지’보다 ‘잘 살아 계신지’를 묻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살기 위한 것이기 이전에 단순히 '고통스럽고 불편한 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복되는 처치와 낯선 기계 소리,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불편함은 때때로 환자분들을 지치게 만들 것 같다. 그럼에도 치료는 멈출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한다. 간호사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생명을 지킨다는 일이 때로는 누군가에겐 고통을 연장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정말 이분을 위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가래를 뽑고, 수액을 체크하고, 자세를 바꾸고, 온몸을 살핀다. 손끝이 살짝 움직이는 것, 시선을 맞추는 짧은 순간조차 나에겐 큰 위안이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생존’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몸에서 반응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나를 다시 이 자리로 이끈다.
고통은 완전히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고통 안에서, 환자분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덜 두렵고, 덜 외롭게 느끼셨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그 고통 속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느끼실 수 있도록, 최소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도록.
어쩌면 간호사는 그걸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생명 곁에 함께 있어주는 존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