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살게 하는 사소한 것들

#11. 피곤한 퇴근길, 맥주 한 잔이 간절한 우리에게

by 박희영

현관문을 닫는 순간, 하루의 무게가 온몸으로 쏟아졌다. 구겨진 셔츠 소매에는 아직 사무실의 공기가 묻어 있었고, 머릿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말이 남아 있었다. 오늘, 상사가 던진 날 선 한마디. 억울했지만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삼켜야 했던 순간. 그 말은 퇴근길 내내 속을 쓰리게 했다.



가방을 탁자 위에 밀쳐 두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 서늘하게 빛나는 은빛 캔 하나. 손끝으로 집어드는 순간, 이미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딸깍. 치익.


캔뚜껑이 열리며 터져 나온 소리는, 닫혀 있던 마음에 숨구멍이 트이는 듯했다. 입술을 대고 첫 모금을 삼키자, 차갑고 쌉싸래한 물결이 텅 빈 위 속으로 곧장 흘러내렸다. 오늘의 모욕과 답답함이 그 서늘함에 덮여 조금은 가라앉았다. 아린 듯 시원한 감촉이 몸 안 깊숙이 스며드는 동안, 가만히 숨을 고르며 창문을 열었다.



두 번째 모금은 천천히, 오래 머금었다. 탄산이 혀끝에서 터지며 목을 간질이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불쑥 피어올랐다. 대학 시절, 야구장 스탠드에 앉아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밤. 치킨 상자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부딪히던 잔의 투명한 울림. 8회 말, 뒤집기에 성공했을 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던 짜릿한 시원함. 그때의 맥주 맛이 지금 입안에 되살아났다. 그제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 맛에 산다.”


그 말에 스스로도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의 상처가 무색해질 만큼 가벼워졌다.




세 번째 모금은 불 꺼진 방 안에서의 기억을 불러왔다. 이별 직후, 혼자서 마시던 병맥주의 쓰디쓴 맛. 눈물이 섞여 짠맛으로 변해버리던 그 순간에도, 맥주는 끝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너 혼자가 아니야’ 하고 속삭이듯, 거품이 잔 위에서 부서졌다.




다시 한 모금, 캔을 기울였다. 여름밤의 더운 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지만, 황금빛 맥주는 속을 천천히 식히고 있었다. 오늘의 허기는 여전하건만, 더 이상 자신을 무너뜨리진 않았다. 잔 속의 기포가 쉼 없이 솟아올랐다. 그 작고 투명한 거품은 금세 사라지지만,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늘 같은 것이었다.



여름밤의 후끈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밀려들었다. 이상하게도 속은 차분히 식어갔다. 맥주는 금세 사라지지만, 사라진 자리마다 위로가 남았다. 한 모금은 상처를 덮고, 또 한 모금은 웃음을 불러내고, 마지막 모금은 내일을 살아낼 힘을 건넸다.


그제야 알았다.

살 만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맥주 캔을 내려놓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달걀 두 개쯤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른자가 반쯤 익어 흔들리는 계란 프라이를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맥주 한 캔이 전한 건 건 단순한 위안이 아니었다. 허기와 함께 찾아온, 내일도 먹고, 마시고, 살아가야겠다는 작은 희망이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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