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

#10. 여행지에서의 일탈을 추억하는 당신에게

by 박희영

공항 유리문이 열리자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차가운 공기를 기대했던 환풍기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바람이 쏟아져 나왔고, 바닥은 이미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줄지어 선 택시에서 흘러나온 매연과 옆 사람의 땀 냄새, 강한 향수가 뒤섞여 머리를 무겁게 눌렀다. 유리는 버스 창가에 앉아 도시로 들어갔다. 창문 밖으로는 간판들이 원색을 쏟아내듯 번져 서로 겹쳤고, 가로수 잎은 먼지와 열기를 머금어 축 늘어져 있었다.




골목을 가득 메운 북소리와 기름 냄새는 숙소 안까지 스며들었다. 천장 선풍기 날개가 천천히 회전하며 뜨거운 공기를 휘저을 때, 유리는 문턱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숙소 계단을 내려갔다. 광장은 사람들의 몸과 불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천막 아래에서는 연기가 솟구쳐 조명에 자꾸 잡혔다. 그곳에서 낯선 그가 손짓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흉터, 잠깐 웃는 눈빛이 유리를 붙잡았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유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일 때, 발끝이 서로 부딪히고 리듬은 어설펐지만 웃음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낯선 언어 대신 호흡과 발소리가 박자가 되었고,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은 같은 박자 속에서 같은 사람이 된 듯했다. 춤이 끝나자 포장마차 불판에서 고기가 튀겨지는 소리와 레몬 즙의 신맛이 한꺼번에 공기를 채웠다. 손끝에 묻은 소스를 닦으려다 스친 순간, 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여행 왔다가… 눌러 앉았어요. 지금은 근처 공방에서 지내요. 이준성입니다.”


낯선 거리 한복판에서 들린 한국어는 갑작스러운 친밀감을 만들어냈다.

여행지에서 이어진 며칠은 모두 선명했다. 과일 껍질과 생선 비늘로 젖은 시장 바닥에 흩어진 유리의 팔찌를 주워주던 손길, 소나기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던 순간, 세탁소 드럼 세탁기 안에서 서로를 찰싹거리며 돌던 젖은 천의 소리, 그리고 밤마다 목이 쉬도록 불렀던 노래들. 작은 사건마다 준성이 곁에 있었고, 유리는 점점 자신의 소심함이 더위에 녹아내리는 것을 실감했다.



마지막 날 밤, 바닷가는 낮의 열을 품어 아직 따뜻했고, 바닷물은 종아리를 감싸며 일정한 온도로 밀려왔다. 조약돌들이 파도에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이 들릴 때, 준성이 모래 위에서 말했다.


“다시 가고 싶어졌어, 한국”


그 말은 담백했지만 유리의 귀에는 오래 맴도는 고백처럼 들렸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허리까지 물에 몸을 담갔다. 파도에 흩어진 별빛이 피부에 스며드는 듯 반짝였다.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는 버스 창가에 앉은 유리는 준성에게 소리쳤다.


“우리 한국에서 꼭 봐!”


작은 방울 소리가 엔진의 무거운 진동 사이에서 간신히 울렸다. 여름의 냄새와 불빛,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눈빛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이게 다 여름 때문이다. 더위에 지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계절. 오로지 감각과 본능만 남은 계절 탓이다.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하는 계절에, 유리는 괜한 행복을 느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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