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녀의 이야기

#9. 사랑 앞에 용기를 내지 못한 그대에게

by 박희영

라테 잔 위로 올라온 거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싼 채 오래도록 입을 열지 못했다. 잔의 미지근한 온기는 애써 붙잡고 싶은 마음 같았지만, 차가워져 가는 마음을 끝내 덮지 못했다.



“올여름은 유난히 길지 않아?”



그가 던진 가벼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렇지. 하지만, 길었던 여름도 결국엔 지나가잖아. 늘 그렇듯이.”



말끝에 스스로 놀랐다. 계절 얘기를 빌려 건넨 말이었지만, 그것이 곧 작별의 다른 이름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 없는 오후, 은행잎은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매미 소리는 쉼 없이 들려왔다. 햇살은 창유리에 달라붙어 안으로 번져 들어왔고, 땀방울은 목덜미를 따라 천천히 흘렀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녀는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붙잡고 있으면… 더 힘들어질 때가 있더라.”



그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 찰나에 그녀는 작은 희망을 걸었다. 제발, 나를 붙잡아 줘. 아직 갈 준비가 다 된 건 아니야.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역시 나 같은 사람은 끝내 버려지는구나.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이 결국은 짐이 되었을 거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 속의 얼음이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먼저 일어날게”



말은 평범했지만, 목소리 끝은 갈라졌다. 그 또한 마지막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페 문을 열자 바깥의 공기가 들이쳤다.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 전깃줄에 매달린 매미들의 고막을 찢을 듯한 울음,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들. 여름은 끝나가는 듯 보이면서도, 잔인하게도 여전히 뜨거웠다. 그녀는 발걸음을 떼며, 그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듯 길 위로 나섰다.




지금도 가끔 그녀는 그 여름날을 떠올린다.
그가 왜 붙잡지 않았을까.
정말 사랑이 식어서였을까,
아니면 나처럼 가진 게 없어 결국은 서로 버림받은 걸까.



그 해의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니, 남은 건 더위가 아니라 끝내 붙잡히지 못한 마음의 그림자였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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