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수공업으로 한 땀 한 땀
신곡을 발표하는 무대라 출연자는 가사용 프롬프터를 요청했고 (그땐 몰랐지만 가사용 프롬프터는 음악프로그램에는 필수 장비다) 음악 방송 제작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우리는 프롬프터 세팅이 안된다고 전달했는데, 당시 피디였던 프롬프터 대신에 사용할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바로 그것은 "대자보"였다.
대자보라니. 요즘 세대는 알 길이 없는 대자보의 존재를 선배 입에서 듣다니! 잊고 살던 단어였지만, 선배가 대자보라고 하는 동시에 어떤 사이즈가 어떤 용도로 쓰일지를 선명히 떠올랐다. 대자보는 <1930년대 초기 소련에서 정치선전의 목적으로 활용되었던 벽보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 확산된 벽신문 유형의 대중언론 매체이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가에서 활발하게 나붙기 시작했다>라고 포털 백과사전에 올라있는데, 8-90년대 대학생활을 한 우리에게는 단순히 벽에 붙는 모든 게시물이 아니라 특정 사이즈의 특정 필체가 담긴 커다란 종이 한 장. 그것이 대자보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혹시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80년대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기억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괘도" 사이즈의 종이 말이다. 선배의 추진력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프롬프터를 대신할 대자보 용지를 사고, 가사를 쓸 매직과 가사를 적을 담당자까지 일사천리로 배정했다.
그런데 대자보를 써 본 적 없는 요원이 이 일을 맡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다른 방송에서는 늘 해오던 대로 하던 일만 하면 되는데, 우리 프로그램은 늘 새로운 무언가를 시키고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하는) 일까지 해야 하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필기를 담당한 요원은 나름의 복수로 가사를 추사 김정희 선생도 따라 쓰지 못할 흘림체로 완성해 놓은 종이를 녹화 순간에 들고 왔다. 그 순간은 참 하나도 쉬운 일이 없다 싶었다. 나름의 불만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어린 담당자도, 이 상황에서도 음악프로그램을 한 번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나도, 우리 프로그램을 무슨 80년대 분교 녹화쯤으로 기억할 저, 나의 최애 가수도. 총제적인 난국 안에서 녹화는 시작됐고, 나는 정말이지 최애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명절이나 가족 대소사에 친인척들이 모이면, 불행 배틀을 벌이듯이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 어렸을 적 나는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왜 그 시절 이야기를 자꾸 하는지를. 그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그때보단 가난하지 않으니까 하는 거야. 그 시절은 겪고 지금은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지.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다면 그 얘기를 어떻게 하니. 어른들의 훈장 같은 거야.라고. 엄마의 이 말처럼 지금 내가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이 또한 가난한 시절의 에피소드가 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치욕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때 이런 적도 있었잖아 하고 깔깔 웃는 하나의 추억이 됐다. 그리고 나는 일 년 후, 그 팀을 다시 섭외했고, 최고의 시스템을 갖추고 론칭한 우리 프로그램을 자랑했다.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그날은.
(대부분 방송사에서는 뉴스 및 프로그램 진행에 프롬프터를 사용합니다. 이 프롬프터는 뉴스룸 테이블 아래 있거나, 정면 카메라에 설치해서 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음악프로그램 녹화를 위한 가사용 프롬프터 설치는 무대에 모니터를 세팅해서 하는 방식이라서 이 방식에 대해 무지했던 에피소드예요^^)
<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