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어?
원래 사진을 잘 쳐다보지 않기도 하고, 셀카 찍어봐야 어차피 지울 거라서 사진 찍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추억으로 남겨보고자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키면 사진을 남기려고 해 봐도 까먹기 일쑤였고, 사진도 맨날 엽기적인 표정과 포즈로 찍어서 그다지 아름다운 사진이 별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 정말 터키에서 만났던 친구들, 그 시간들, 그 은혜들이 그리워서 사진을 꺼내본다.
2023년 8월 26일 사역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준비도 없이 사역을 했다. 언어가 준비되어 있었을까? 그들의 문화를 잘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준비해야 되었을 것들이 있었을까? 주의해야 할 점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 전혀. 나는 날 것의 그대로 그냥 사무실에 1년 치 짐과 가방을 두고, 오직 조금의 여비만 들고나갔을 뿐이다.
수많은 단기 선교들 중에서 대부분의 선교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 첫 단기선교로 갔었던 터키에서조차도 한 번은 엄청 단 멜론을 먹었다가 배탈이 났었고, 나는 물갈이를 하지 않아서 상관없었대도 팀원들이 고생하는 바람에 나까지 힘들었고, 체감 온도는 그렇지 않았어도 평균 50도를 상회하는 여름 날씨와 체력과 건강의 문제로 찬물 대신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했으며, 탄산음료도 금지, 핸드폰은 선교 기간 동안 사용 금지, 숙소도 그다지, 청소년이었던 그 시절 한 번 마음 상하면 서로 말도 못 했고, 정말 우연의 사고로 오해가 생기거나, 사고가 터져서 일정이 급하게 수정된 당황스러운 때도 있었고, 의도치 않았는데 억울한 일도 여럿. 여러모로 선교에 대한 첫 기억은 좋지 못했다. 마지막 날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다시 오나 봐라 다짐했던 내가 한국에 복귀하고 나서 선교를 돌아보며 내가 했던 소감은 '좋았다'였다.
왜였을까? 몸은 그렇게 고생하고, 그다지 좋은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친했지만 멀어진 친구들도 있어서 불쾌한 일만 가득했는데, 왜였을까? 나는 왜 좋았을까?
나는 더럽다. 더러운 사람이다. 음란하고, 순한 얼굴 뒤로 숱한 이면이 있으며, 나 자신까지도 속이고, 예수님에게도 속인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무책임하게 피하려고 하고, 머릿속에서는 적당한 핑계를 찾아내 시뮬레이션하며 말을 맞춰보기도 하고, 마치 소설을 쓰듯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선교사님께 들었던 나에 대한 첫 번째 평이 '넌, 지능적이야. 너무 똑똑해. 아주 지능적으로, 아주 교묘하게, 악해.'였다.
벌써 1년이 지났다.
터키 1년이라는 선교에도 나는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다. 똑같다. 틈만 생기면 벗어나고 도망치고, 떠나버린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나는 받아들였다. 절대 맞서지 않았다.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원하는 대로, 즐겁게 즐겼다. 나는 방금도 하나님 앞에 범죄 했다. 여전히 거짓말, 여전히 속임수, 여전히 도망, 여전히 무책임, 여전히 방어하고, 여전히 모르는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는 하나님 사랑해.
모르겠어. 근데, 하나님이 너무 좋아. 그냥 절로 미소가 번져.
신기하지. 너무 이상해.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터키에서의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믿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천국에 가려는 거야? 목적 같은 거 말이야."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모른다. 삶이나 행동 거지를 보면 내 마음대로 할 거면서 왜 교회 다니고, 왜 예배에 나아가고, 왜 기도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성경 읽으면 뭐 해, 어차피 내 마음대로 살 건데. 큐티하면 뭐 해, 하루 빠진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교회 봉사 하면 뭐 해, 아침에 졸리기만 하지. 전도? 서로 기분 나쁘고, 서로 지치고, 서로 힘들어.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처절하게 더러운 사람이다. 항상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나는 지금 노인복지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분이 내게 물었다.
"XX 씨는, 왜 믿어요? 삶에 대한 감사? 아니면 평안?"
이 분은 믿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큰 명절에 근처 교회 가서 감사 기도하는 정도의 사람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부적처럼 또는 특별한 날에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터키에서의 똑같은 질문을 얼마 전 이 분에게서 들었다. 나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뭐라고 답하지? 나도 모르겠는데. 믿기는 믿지. 성경 속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어져. 그런데,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많은 복합적인 생각들이 뒤엉켜 이번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분에게 한 가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아니었어요. 그가 없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터키 다녀온 것도, 그동안 내가 수많은 삽질을 했던 것도 하나님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기보다, 그가 나를 사랑하기에 제게 지금도 계속 이런 시간을 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그분은 내가 한 말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내 답이 하나님께 전해졌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내 깊은 응어리가 덜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던져버리기 시작했다.
내가 숨겨왔던 나만의 진실들을, 나만의 죄악들을, 나만의 작고 소중했던 거짓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맞아,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없었겠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터키 다녀온 거, 다들 교회에서 어떻게 다녀왔냐고 물어봐. 그거 갈 수 있는 거 맞냐고. 복지센터 직원 분들도 내가 선교 다녀온 거 아는데, 자꾸 물어봐. 터키 어떻게 다녀왔냐고, 그 전쟁통에, 어떻게 선교 같은 걸 할 수 있었냐고. 진짜 특전사 아니냐고 말이야.'
나는 그때마다 항상 말한다. 그 정도 아니고, 그 정도로 위험하지 않고, 보라고 나 아무 탈 없다고. 몇 번 신고도 받았고, 경찰들에게 쫓기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때 다른 분이 답했다.
"그러면 다행이에요. 그게 감사죠. 무탈하게 다녀왔으면."
이 다른 분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러네. 그게 감사네. 분쟁 국가 근처에서 사역했고, 어쩌면 국경도 넘었었고, 사고도 여럿 있었고, 개인정보가 털리는 일, 추방될 뻔한 일도 있었는데, 어떻게 나는 '잘' 다녀왔지? 나는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왔지? 나는 왜 무탈하게 한국에 도착했지?
정말로 생각해 보면 매 순간이 하나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찰들에게도 전도했다.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이맘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이슬람 사원인 자미에 들어가서 찬양을 불렀다. 뉴스 기자가 다가와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큰 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버스킹 비슷하게 한 적도 있었다. 현지 교회에 들어갔다가 다른 한국인을 만나서 우리의 정체가 들킨 적도 있었다. 비자가 안 나와서 불법체류로 있었다. 이런 현실적인 것들 말고도 더 많다.
매일 죄짓지만 나는 진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님의 나에 대한 첫 번째 평 다음에 하신 말씀이 있다.
'맞아, 넌 너무 똑똑해서 지능적으로 죄를 지어. 너는 틈과 틈 사이를 파고들며 거짓말한다고.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전한 복음은 가짜일까? 그건 아니야. 그러니까 정죄하지 마. 네가 끊어내려는 노력뿐 아니라 진짜로 고통으로 기도하면서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해.'
매 순간 하나님은 같이 있다. 함께 계신다. 내가 죄로 힘들어 하지만, 내게 마음을 주신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애초 나는 복음을 전하지 못했을 거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XX아, 넌 악해. 그런데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는 순간 지는 거야. 강하게 더 싸워. 더 밀고 나가. 청년답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면 돼. 그게 실수라고, 오점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원래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 그 세상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 공동체도 예수님과 그 열두 제자 공동체만 완벽했어.'
인스타그램을 다시 시작했다. 카카오톡만큼 없어선 안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회 계정이 인스타그램이 있다고 하니 계정 비활성화한 건 그대로 두고, 새로운 이메일로 가입했다. 그리고 교회 계정을 팔로우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메인 화면에 올라오는 피드들이 다 기독교 내용으로 바뀌었다.
미디어의 무서움이라고 릴스를 보다 보니 어느 순간 기독교 내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증하는 사람들, 애니메이션도 있었고, 예배팀, 찬양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 중간중간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 좋은 찬양, 사회를 풍자한 연극이나 시사 콘텐츠, 워십 등 천천히 내려보기 시작했다.
와, 이런 사람이 있네. 정말 창의적이다. 이렇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잖아. 와, 드럼 치는 목사님? 찬양팀은 많은데, 미디어 방송부 이런 건 없나? 가사 ppt 같은 사람들도 진짜 힘든데..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예배를? 기독교 인식. 일반인 인터뷰?
많은 것들을 봤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어떤 환경에서 그들이 자라왔는지 모르지만, 이런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에 신기하고, 감사했다.
이들도 어쩌면 나와 비슷할 텐데, 편안하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자의 더러운 응어리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항상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순간 정말 지는 거야. 하나님 없었다면 이 자리에 나도 없었을 거야. 내가 이런 시간도 없었겠지. 내가 이것을 보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가 아니었다면, 나도 아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났다.
죄송했다. 방금 전까지는 유튜브나 보면서, 넷플릭스나 보면서, 상상하면서 더러웠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주의 자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기도했다.
정말 다 버린다. 지우고, 버리고, 거둬내고, 드러내고, 들추고, 비추고, 비틀고, 꼬아서 정말 다 버린다. 다시 불타기 원한다. 나는 다시 불타고 싶다. 어떻게 다시 불탈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다시 새로운 시작이라고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나는 뭘 잘하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도파민에 절여진 거 말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 말주변도 없고, 조용한 내가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고민해 보면서 기도해 보면서 나아가다 보면 길이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