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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림 Jul 23. 2024

봄의 단상

우리 가족 냄새

아직 두 손으로 이불을 번쩍 들기엔 키가 모자라 발판이 필요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겨울 동안 차갑고 시린 해에 이불을 바싹 건조시키지 못했던 엄마는 아직 찬 바람이 가시지 않은 초봄부터 이불 빨래를 하셨다.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세탁기에서 막 꺼낸 이불을 집안에 던져놓으면 물을 먹어 축축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반쯤은 질질 끌고 베란다로 향한다. 밤동안 덮고 자던 솜이불은 보드랍고 포근했는데 물을 먹으니 세 살 어린 동생이 땡깡을 부릴때 억지로 끌고 가던 것처럼 두 팔이 파들 거리게 무겁고 발에 채이는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건조대가 휘청거리지 않게 몸으로 잘 지탱하고 이불을 넓게 펼쳤다. 아빠를 세명은 붙여놓은 것 같은 커다란 이불을 건조대에 널어두면 한번 허리를 뒤로 젖혀 통통 두드려야 한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아직 초등학생이 무슨 허리를 짚냐하지만 159의 조그마한 키를 가진 엄마와 초등학교 5학년에 벌써 160을 넘긴 나는 엄마가 알지 못하는 1cm의 고충을 겪고 있는 중이다.


아직 세탁실에서 나오지 않은 엄마를 힐끔거리다 아파트 난간 위로 올라섰다. 베란다 안전난간에는 어제 먼저 빨아둔 이불이 물을 한가득 덜어내고 봄 햇살에 뽀송함을 담기 위해 널려있었다. 발을 딛고 올라서서 겨드랑이께에 올라오는 안전난간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면 거실 깊숙하게 들어오지 못하던 햇살이 머리 위에서 정수리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뜨끈뜨끈해지는 머리를 몇 번 만지다 이불 위로 팔을 내밀고 난간에 머리를 기대면 이번엔 볼 위로 햇빛이 내리쬐고 귀에는 놀이터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저 멀리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 산책로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


햇빛에 눈이 시릴 때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냄새에 민감한 동생의 닦달에 섬유유연제만큼은 가격 대신 좋은 향을 고르는 엄마가 이번에도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으신 것 같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살랑이게 바람이 부는데 이불의 뽀송한 향기가 코끝에서 떠나질 않는 걸 보니.

어쩌면 내 코 안쪽에는 콧물이 모이는 곳처럼 냄새가 모여 있는 방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밤새 덮고 자는 냄새. 매일 아침 학교에 나서기 전 입는 냄새. 현관문을 열면 가장 먼저 맡는 냄새. 엄마의 배에서, 아빠의 등에서, 동생의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가 떠나지 않고 콧속에 모여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따라다닌다. 엄마가 보면 위험하다고 기겁하는 행동이지만 봄 햇살에 이불을 말릴 때면 나만의 의식처럼 햇빛을 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은 집냄새라 부르는 걸 어릴 땐 뭐라고 이름 붙이면 좋을지 몰라서 '우리 가족 냄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어 자기 전이면 몇 번이고 우리 가족 냄새 좋아!라고 말하곤 했다. 몇 번의 봄이 지나가고 분가를 하면서 이제는 맡을 수 없는 집냄새이지만 햇살이 머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봄이 찾아오면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리곤 한다.


어디선가 좋은 향이 난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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