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림 Jul 24. 2024

도깨비 길

나의 생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 남아있기도 하다

나는 지금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걸어가고 있다. 불룩 솟아올랐다가 푹 꺼짐을 반복하는 좁은 보도블록은 세 살 때부터 우리 가족이 살았던 아파트 단지 길이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평평하게 새로 닦은 평지이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는 멀리서 보면 도깨비 도로처럼 크게 울렁이는 구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 좁고 긴 도깨비 길을 걸으면 나는 세 살이었다가 열 살이었다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가 32살의 김태림이 된다.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처럼 불 꺼진 복도 끝에서 단 세 번 만에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존재처럼 나의 일생도 단 10분 만에 세 살에서 서른두 살의 현재로 다가온다. 자주 공상에 빠지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게 취미인 (mbti가 enfp라고 하면 아마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걸을 때면 이번엔 어떤 기억이 떠오를까 나에게 맡기곤 한다. 기억은 떠올리려 애쓰면 미간이 좁혀지지만 자연스레 떠오를 땐 실없는 미소가 지어지기 때문에 그 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내 무릎엔 딱지가 앉고 떨어져 나가 상처가 아문 흔적이 거의 비슷한 위치에 수십 개가 남겨져있다. 투명도를 아주 많이 낮춰 하나씩 보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수십 개의 흔적이 쌓여있으면 얼핏 봐도 보일만한 흔적일 것이다. 그 흔적들의 대부분이 이 길에서 생겨났는데 adhd를 앓고 있는 나는 어릴 때부터 천방지축 덜렁이 오버쟁이 대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높은 에너지와 잠시도 쉬지 않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도 기분이 좋아지면 팔짝팔짝 뛰다가 불룩 솟아올라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바닥에 수차례 꽝하고 박은 무릎은 지금도 자주 시큰 거리고 염증이 나서 비가 오면 괜히 욱신거려 손으로 자주 어루만져줘야 내 연골이 아직 잘 붙어있구나를 느끼게 한다. 서른둘이라고 넘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아직도 자주 어딘가에 발이 걸려 길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탭댄스를 추게 되거나 푸다닥 날아오르는 사람처럼 멋대가리 없는 몸짓을 할 때가 있어서 걸을 땐 땅을 유심히 보는 습관을 가지게 했다.


내 몸에 남은 어린 시절의 흔적을 발견하면 그 흔적의 위로 관통하는 여러 기억과 시간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나 오래 몸에 남을 흔적이면 꽤나 아프고 서럽고 무서웠을 만한 흔적들이 대부분이겠지만 훌쩍 커버린 어른의 몸으로 바라보는 그 흔적들은 때로는 용맹했고 서툴렀으며 담대했다.

수십 번, 또래 친구들보다 자주 넘어졌어도 그 길을 다시 내달렸으며 아무리 힘차게 넘어져도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왔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다.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면 시작되는 이 길은 학교도 갈 수 있고 학원도 갈 수 있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책방과 불량식품이 있고 신상 옷 입히기 스티커가 제일 많은 문방구도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집을 봐도 통 기억이 나지 않던 순간들이 이 길 위에선 생생하다. 아마도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 있고 가슴 설레는 순간들이었기에 오롯이 남겨진 게 아닐까.


갈래갈래 뻗어진 그 길들에 나의 생이 놓여있다.


작가의 이전글 봄의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