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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25. 2022

정의는 살아있을까?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리아에 일어난 가상적인 한스와 사라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스 셀러는 2차 대전 당시 자신의 모든 가족을 히틀러 정권에 의해 잃었고, 사라 안젤은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군에 의한 무차별적 폭격으로 그녀의 모든 가족을 잃었다. 한스와 사라는 삶의 흐름에 밀려 알렉산드리아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나 자신들의 원수인 히틀러 정권의 앞잡이 중 한 명을 살해하게 된다. 


  “심리 과정에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피고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직접적인 원한에 대해선 이를 견디고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한은 풀어주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자기를 밀고하고, 구박하고, 학대한 사람들에 대해선 소련의 억류 생활 중에 얼마라도 원수를 갚을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피차의 운명으로 돌리고 되레 감싸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보도가 전해지자 이러한 그의 성품을 증명할 만한 투서가 기왕의 전우에게서 본사 앞으로 수십 통 날아들기도 했다.”


  한스와 사라가 행한 살인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게 한 히틀러 정권의 앞잡이를 죽인 것은 어떤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한스와 사라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수천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사라지게 한 정권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을까? 그러한 정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정의는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그 정의를 실현해야 할 인간의 존재는 그토록 미약했던 것일까?


  “최고의 미덕은 불의를 행한 자에게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복수하는 행위다. 동서의 법률 전통에는 관허의 복수 행위가 있었다. 이것을 부활시켜야 한다. 이래야 불의를 행한 놈이 꿈쩍 못하리라. 불의와 사악한 야심에의 정열은 치열해 가는데, 이를 징치해야 할 테러의 정열이 식어간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히틀러 정권 따위의 강도적 협잡 정권의 앞잡이 하나쯤을 죽였다는 사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영광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영예를 위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의와 정의는 공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 영역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의의 영역을 줄이고 정의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비록 그러한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많은 대중의 의지가 그 실현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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