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은 풀어야 할 뿐 이을 수가 없다

by 지나온 시간들

우리의 삶은 얽히고 꼬인 실타래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그런 실타래가 우리의 인생일 수도 있다. 김동리의 <역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화개장터에서 인간과 삶이 얽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서른여섯 해 전에 꼭 하룻밤 놀다 갔다는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반하여 옥화를 배게 된 할머니나,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인연을 맺어 성기를 가지게 된 옥화나 다같이 화개장터 주막에 태어났던 그녀들로서는 별로 누구를 원망할 턱도 없는 어미 딸이었다. 성기에게 역마살이 든 것은 어머니가 중 서방을 정한 탓이요, 어머니가 중서방을 정한 것은 할머니가 남사당에게 반했던 때문이라면 성기의 역마운도 결국은 할머니가 장본이라, 이에 할머니는 성기에게 중질을 시켜서 살을 때우려고도 서둘러 보았던 것이고, 중질에서 못다 푼 살을, 이번에는 옥화가 그에게 책장사라도 시켜서 풀어 보려는 속셈인 것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성기는 화개장터라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간에서 살아왔다. 그곳에서의 삶은 얽히고 설키는 인연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은 그들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 갈지 알 수도 없었다. 운명이란 본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기에,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삶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계연은 성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성기는 눈을 떴다. 계연은 당황하여 쥐고 있던 새파란 으름 두 개를 성기의 코끝에 내어 밀었다. 성기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둥그스름한 어깨와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입술이 포개어졌다. 그녀의 조그맣고 도톰한 입수에서는 한나절 먹은 딸기, 오디, 산 복숭아, 으름들의 달짝지근한 풋내와 함께, 황토 흙을 찌는 듯한 향긋하고 고수한 고기 냄새가 느껴졌다.”


우연히 성기의 주막에 잠시 맡겨진 계연, 오누이처럼 지내다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야 만다. 마치 성기의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계연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다시 얽히는 것이다.


“계연의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은, 옥화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성기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인 성기의 두 눈엔 불꽃이 활활 타오를 뿐, 아무런 새로운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빠, 편히 사시오’

하고, 거의 울음이 다 된,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돌아선 계연의 저만치 가고 있는 항라 적삼을, 고운 햇빛과 늘어진 버들가지와 산울림처럼 울려오는 뻐꾸기 울음 속에, 성기는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성기와 계연의 사랑은 운명이 이를 막아섰다. 계연은 성기보다 나이가 어려 동생 같았지만, 사실 성기의 이복 이모였다. 순수한 사랑마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역마살이 그들의 운명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오빠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계연, 이미 마음 한가운데 차지해 버린 계연을 보내고 싶지 않은 성기, 하지만 그들은 이모와 조카라는 굴레 아래 운명처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갈아입은 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맞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질빵해서 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었다. 윗목 판에는 새하얀 가락엿이 반 넘어 들어 있었고, 아래 목판에는 팔다 남은 이야기 책 몇 권과 간단한 방물이 좀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갯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등남으로 난 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려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하동 장터 위를 굽이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운명이라는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역마살을 푸는 것 외에 어떤 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가 않다. 운명의 힘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을 더욱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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