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불행의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가정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추구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불행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불행이 인간의 한계와 예상을 넘는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행복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에게 닥칠 불행에 대해 대비하고 그러한 불행을 이겨나갈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주위의 가까운 사람이 겪는 불행을 보고서도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커다란 불행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나도 그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불행보다는 행운이나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곤 한다.
그렇다 보니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기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불행을 겪게 되면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그 불행에 나의 많은 것을 잃고 만다.
부족할 것 없을 것 같은, 매일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안나가 그 뜨거웠던 사랑을 잃고, 사회에서 매장을 당하며, 사생아를 낳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삶의 의지마저 잃은 채, 결국 자살을 하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 조건이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만그만한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매일 그러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안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었기에 더 커다란 불행의 양태를 경험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불행의 크기와 깊이는 우리가 전혀 잴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의 바닥까지 밀어낼 수도 있으며,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한계의 끝까지도 경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불행이 무서운 것은 우리의 영혼마저 사막의 한복판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모래바람 날리는 그러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삶의 아름다움도 없이, 더 이상의 기대와 희망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불행의 모양이 저마다 다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불행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삶은 우리에게 그만큼의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닥친 불행이 더 이상 커지지 않고 더 험악한 모습으로 되지 않도록 그 불행의 양태를 알아차리고 이를 나의 삶에서 사라지도록 그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톨스토이는 행복의 모습을 고만고만하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독일로 요양을 갔다가 돌아온 키티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그 정도에서 불행을 막아낼 줄 알았다. 그녀의 내면이 그것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키티는 더 이상의 불행 없이 고만고만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불행을 알아볼 수 있고 이를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은 더 이상의 다른 양태의 불행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일상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안나는 몰랐기에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