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한의 단편 소설 <카르마>는 산골 오지에서 만난 사지가 절단된 남자와 그의 집에 사는 정신박약 부부 등의 일상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이 과거를 들추고 상처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나-딸'로 이어지는 카르마, 즉 업(業)의 고리를 확인하게 된다.
“한 지붕 밑의 저 모진 목숨들과 곁방살이하게 되면서 내 육신은 온전한 나의 것일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은 단지 자신들만의 몫이 아니라 내 청년 시절과도 연관이 있지 싶은 생각에 덜미를 잡히곤 한 나였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눈, 코, 입에서 진물을 흘리며 팔꿈치로 방바닥을 설설 기어다니는 그것은 아상에 사로잡힌 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 것인가. 아버지와 자식들의 냉대를 받으며 외양간의 가축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는 삶을 살다 간 어머니, 나무관세음.”
우리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될 수가 없다. 많은 인연이 얽히고 설켜 한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지 않은 인연, 끊고 싶은 인연도 있고, 잇고 싶어도 이을 수 없는 인연도 있다. 삶이 간단할 수가 없는 것은 이러한 인연이 나의 의지와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내가 어머니 몫을 대신해 주고 있어서 목마름이 덜해졌지만 청소년기의 어머니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여서, 지난날 나의 패덕과 정신적인 황폐는 어쩌면 어머니 없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그 시절 내게 어머니란 한시바삐 어디다 내다 버리고 싶은 귀찮은 짐 보퉁이 같은 존재였다. 그건 아마도 나 한 사람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가족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고 간 어머니의 반평생이란 회상하기에도 끔찍한 그 무엇이었다. 굳이 옛일을 되살리려 애써본 적도 없지만 지난날들이 스멀거리며 되살아나기라도 할라치면 도망치기 바빴던 내가 아니던가.”
아무리 가까운 인연이라 하더라고 차라리 없는 인연이 나을 수가 있고,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이 나와 가까운 사람과 얽힌 인연일 수도 있다.
인연으로 인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연이 평범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아픈 시간과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치유되지도 않고 언제 또 그러한 아픔을 겪게 될지 알 수도 없다.
“둘째 형님의 시신이 어느 산골짜기에 묻혔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아버지가 시신을 고리짝에 넣어 지게에 지고 나가던 그 겨울, 이른 새벽의 골목길을 울리며 사라져가던 아버지의 고무신 발자국 소리. 고리짝 무게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던 아버지의 휜 다리.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윤회 생사의 긴 과정에 끼여든 한 토막 삽화였으며, 그 삽화의 연장이 나를 비롯한 중생들의 현재 모습임을 이 나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다니. 무지요, 무명이로다. 나무관세음.”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인연이기에 살아있을 때의 많은 순간은 가슴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인연도 언제는 끝나기 마련이다. 그 질긴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날 우리는 새삼 그 사람의 존재를 마음 깊이 느낄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그 아픈 상처 그리고 조금은 아름다웠던 추억과 작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미쳐버린 둘째 형님까지 가세하여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던 그 시절, 철없던 내가 무심히 흘려넘겼던 어머니의 그 저주에 찬 말들은 곧 어머니가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와병 초기에 집안에 재산이 좀 남아 있던 시절, 사흘들이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던 일들, 그러다 어느 날은 별안간 아버지가 들이닥쳐 무당을 내쫓고 굿판을 둘러엎으며 난리를 치던 일들, 벽장에 향불 피워 삼신할매를 모시던 토속 신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 곡조 없는 찬송가며 할렐루야를 군입거리 삼아 입에 달고 다니던 어머니. 오죽 몸이 아프고 답답했으면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아무 종교나 맞닥뜨리는 대로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을까. 이윽고는 불교, 유고, 기독교를 두루두루 합친 어정쩡한 짬뽕 신앙을 붙안고 저 세상으로 가버린 뒤, 어머니의 무주고혼은 지금 어느 종교의 하늘 밑을 노닐고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생에서 함께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같이 보내는 그 시간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지나고 나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수많은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지만 이생을 마무리하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영원한 작별만이 기다릴 뿐이다. 아무리 소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만나지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인연이 질긴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