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김수현 드라마 아트홀에서 수업을 듣던 중, 불현듯 마라톤에 대한 대본을 쓰고 싶었다. 스토리의 구조를 대충 생각하고 나서, 막상 쓰려니 아무래도 직접 마라톤을 뛰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 마라톤 풀코스를 접수하고 나서 아무래도 연습을 해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일이 너무 많아 운동할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간신히 대회 당일 전 2주 정도 억지로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두 시간 간신히 운동을 하고 춘천으로 향했다. 주위에서는 모두가 걱정을 하며 말렸다. 연습도 하지 않고 풀코스를 뛰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고 난리들이었다. 게다가 마라톤 경험도 별로 없고 같이 뛰어 줄 사람도 없는데 중간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차라리 하프를 뛰라고들 하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마라톤이나 풀코스보다 대본 쓰는 것에 있었기에 풀코스를 뛰지 않고는 마라톤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어 대본을 위해서라도 일단 풀코스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회 당일 춘천에는 2만 명에 가까운 인파들로 북적였다. 출발하기 전 내 마음속에는 결승선만 있었다. 중간에 어떻게 되건 말건,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리가 아파 뛰지 못하면 걸어서라도 결승선에 들어오겠다는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야 자신 있게 대본에 많은 스토리를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출발신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초반에 페이스를 조금 빨리 달려야 어느 정도 가망성이 있을 것 같아 4시간 20분 페이스 메이커 뒤를 바짝 따라 달렸다. 반환점까지는 그나마 잘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반환점을 돌자 걱정했던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준비도 많이 못했고 운동도 부족하여 더 이상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의욕이 있다고 하더라도 몸이 따라가 주지 않으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마침 4시간 40분 페이스 메이커가 오길래 그 뒤를 다시 따라 달렸다. 하지만 체력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자 금새 4시가 40분 페이스 메이커조차 따라붙지를 못했다. 그나마 마의 28~30km 구간을 넘었기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이미 다리에 쥐가 나서 길바닥에 드러눕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앰뷸런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갈수록 쥐로 인해 길바닥에 아예 벌렁 드러눕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중간에 쉬어버리면 끝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 이를 악물어 계속 달렸다. 다른 생각을 하면 포기하고 싶을 것 같아,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중간에 정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십 번도 더 생겼다. 뭐라도 먹으면 그런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아 주최 측에서 테이블에 준비해 둔 바나나, 초코파이, 생수를 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물을 너무 먹어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35km를 넘어서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다시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서는 대본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샤워를 한 상태였고, 다리는 거의 풀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가던 중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제 다 왔구나, 이제 끝난다’라는 생각이 힘들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결승선을 향해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 이것을 끝내야만 한다는 마음 밖에는 없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두 팔을 번적 쳐들었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때 느낀 환희는 결코 잊지를 못한다. ‘아 이제 대본을 쓸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고통을 극복해 내기는 힘에 겹지만 극복한 이후의 순간은 정말 눈부시다. 이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환희의 순간이다. 고통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 눈부신 순간을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비록 힘이 들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것에 나의 존재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눈부신 그 순간을 위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크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결승선만 바라보고 달린다면 언젠가 두 팔 들어 그 환희의 순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