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언어에 휘둘려 어쩌면 의미 있지만 어쩌면 허무할 수도 있을 시간의 울타리에 둘러싸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후명의 <누란의 사랑>은 삶의 한가운데 사랑이 왔고, 그 사랑이 언젠간 떠나갈 것을 아는 두 남녀의 허무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찌하여 유독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일까. 숙명이니 섭리니 하는 낱말들은 정말 그럴듯했다. 나는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해서 오히려 막막한 외로움에 휩싸인 느낌이기도 했다. 푸른 바다는 심연에서부터 설레는 사랑의 표상이었다.”
사랑은 우연처럼 다가와 필연처럼 멈춘다. 그것을 인연이라고, 운명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인다.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 사라지듯,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함수일 뿐이다. 하지만 잠시일지라도, 아니 조금 더 오래일지라도,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은 분명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사실이지 난 니가 집을 나갔을 때는 미워할 게 없어져서 늘 맘이 비어 있었다. 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난 줄곧 누군가 미워해야만 직성이 풀렸으니까. 그런데 막상 너밖에는 미워할 사람도 없었던 거야. 믿을 게 없어진 셈이지.”
미움도 사랑의 일부일지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미움 그 자체도 없다. 소유라는 감정이 사랑의 본질의 일부인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미워할 어떠한 것도 없을 것이다. 미움마저 사라지는 날 사랑은 끝난다. 더 이상의 인연이 계속되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믿게 되고, 믿을 수 있기에 미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랑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기에 그렇게 미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얼마를 구태여 따진다면 두 달 열흘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그렇게 꿈꾸어 왔듯이 또한 헤어짐을 꿈꾸어 왔다는 말이 된다. (중략) 누란, 아버지가 꼭 그곳으로 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역 땅 그곳으로 가는 한 사내를 머릿속에 그렸다. 아울러, 양파꽃과 파꽃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어도, 파를 그렇게 만지기 힘들어하던 그녀를 생각했고 또 파꽃이 피어 있던 그 여관을 생각했다. 누란은 폐허가 된 오아시스 나라였다. 그 여관도 지금쯤 흔적 없이 뜯겼을 것이다. 그 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누란에서 옛 여자 미라가 발견된 것은 다시 얼마가 지나서였다. 그 미라를 덮고 있는 붉은 조각에는 ‘천세불변’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변치 말자는 그 글자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미라는 미라에 다름이 아닌 것이었다. 미라와 그리고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이 피는 나라. 그것이 우리의 만남인가. 세상 모든 만남이 그런 것인가. 아니, 폐허와 같은 사랑도 어떤 섭리의 밀명을 띠고 있는 것인가.”
사랑보다는 존재 그 자체를 믿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있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꽃이 피면 언젠간 지듯, 삶의 한복판에 가슴 깊이 밀려왔던 사랑도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서산을 넘어가고 말았다. 지는 해를 어쩔 수는 없다. 다만 햇살이 있는 동안 따스함을 느꼈다는 것, 혼자인 것 같은 이 세상에 누군가와 함께 했었다는 것, 사랑은 그래서 어쩌면 허무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