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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y 10. 2023

해미 성지

해미성지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하고 있다. 해미는 조선 초기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곳이다. 1651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1,5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사를 거느리던 무관 영장은 해미 현감을 겸하였다. 해미현감은 해안수비의 명목으로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근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면 모두 이곳으로 끌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도 1814년 이곳에서 순교했다.


  1846년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당시 조정의 반대세력들의 공세가 이어지자 정권 유지를 위해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을 내린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해미진영은 천주교도의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이 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1866년부터 1876년까지 6년의 박해기간 동안 이곳에서 처형된 천주교도만 1,000명 이상이라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처형해야 할 천주교도가 너무 많아, 나중에는 절차를 무시하고 천주교도들을 그냥 생매장했다고 한다. 


  당시 처형된 자들의 신분이 대부분 서민층이었기에 관군은 그들에 대한 심리나 기록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형하였다. 처형을 집행한 관리들은 귀찮은 나머지 조정에 보고를 누락시키거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 초기에는 해미읍성 서문 밖에서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한 명씩 죽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몸을 들어 올린 후 메어쳐서 머리가 깨져 죽게 하고, 철사 줄로 천주교도를 고목에 매달아 죽이기도 하였다.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고 했고, 혹시 죽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횃불로 지졌다고 한다. 점점 처형해야 할 천주교인들이 많아지자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해 해미 진영의 서쪽 들판에 큰 구덩이를 판 후, 수십 명의 교인들을 끌고 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은 뒤 흙을 덮은 후, 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흙 위에는 자갈로 덮었다고 한다. 유해 발굴 당시 캐어낸 뼈들이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고 이것이 생매장을 증명한다.


  여름철에는 땅을 파야하는 관군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수장을 시키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개울 한가운데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유로운 신앙을 위한 외침, 해미순교성지). 


 1935년 서산성당의 범바로 신부가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를 발굴하여 박해 당시 관군에 의해 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1995년부터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2003년 완료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 성지를 직접 방문하였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광화문 앞에서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열렸는데, 해미 순교자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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