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내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 어쩌면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자신의 진정한 삶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도 한다.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우리 내면의 이원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 황야의 이리도 복합적인 존재가 다 그렇듯이 때론 이리의 감정으로 때론 인간의 감정으로 살았지만,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우리의 내면에는 나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고, 그로 인해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인간으로, 어떤 때는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소위 황야의 이리가 우리의 내면을 결정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나는 이 세상의 목적에 공감할 수 없고, 이 세상의 어떠한 기쁨도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내가 한 마리의 황야의 이리, 한 초라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겠는가! 나는 정말 말 그대로 황야의 이리인 것이다. 나야말로 고향도, 공기도, 양식도 찾지 못하는 짐승, 낯설고 알 수 없는 세상에 잘못 들어선 짐승인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유와 이상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과 항상 많은 문제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싸우기도 하지만, 은둔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나는 황야의 이리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점점 더 자유로워졌고, 아무도 그에게 명령하지 않았으며, 그는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유롭게 혼자서 일체의 행동을 결정했다. 강한 자는 자신이 진정한 충동에서 추구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손에 넣은 그 자유의 한가운데에서 하리는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그의 자유는 죽음이며, 그는 외톨이이고, 세상은 그를 끔찍스럽게 방치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는 점점 더 희박해지는 관계 상실과 고독의 공기 중에서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고립과 자유는 더 이상 그의 소망이 아니라 목적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요, 그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따라 살아가다 보니 나 자신이 황야의 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길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나의 내면에 어울릴 수는 있으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 길은 상처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어쩌면 절대고독이라는 아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인간에 이르는 길, 불멸에 이르는 길을 하리는 분명 예감할 수 있었고, 또한 때때로 주저하면서도 그 길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그 대가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겪지만, 하리는 하나뿐인 불멸로의 좁은 길을 가라는 저 지고의 요구와 정신이 추구하는 저 진정한 인간됨을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이 보다 더 큰 고뇌와 추방과 최후의 포기로, 어쩌면 단두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간의 길은 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일지도 모른다. 참나를 발견해야 나 자신을 어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원성을 인정하고 비록 커다란 고뇌와 아픔이 있을지언정 그 이원성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로서의 삶이 될 수 있기에 거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