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by 지나온 시간들


https://youtu.be/h8V3bm8ioGM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에겐 꿈에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곳, 그곳이 이 지구 상 어딘가에는 있다. 모든 아픔과 설움을 잊을 수 있는 곳,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무슨 일과 상관없이 그저 받아주는 곳, 그런 곳이 어딘가에는 있다.


그리움이 있는 곳, 모든 것이 소중한 곳, 하지만 그리 특별하지는 않은 곳, 단지 나의 마음에 합한 곳,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어릴 적 함께 했던 것들이 있는 곳, 너무나 익숙해 하나도 불편함이 없는 곳,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는 곳, 그저 모든 것이 전부인 듯한 그러한 곳이 어딘가엔 있다.


정겹고 푸근한 곳, 가난할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부자일 수 있는 곳, 내가 마음껏 뛰어놀고 거침없이 뛰어다녔던 곳, 푸른 하늘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에게는 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 따스한 손을 잡고 함께 다녔던 사람들, 밤하늘의 별을 세어가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곳, 그곳이 우리에겐 있다.


떠났지만 떠날 수 없는 곳,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찾는 곳, 그리고 나의 뼈를 묻어야 하는 곳, 그곳이 이 지구 상의 어딘가에 우리에게는 있다.


결코 잊쳐지지 않는 그곳의 너른 벌판에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은 마음껏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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