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어머니한테 회초리를 무던히도 맞았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아마 견뎌내지 못했으리라. 형과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회초리를 드셨다. 형은 어머니의 회초리가 무서워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동네 밖으로 도망쳤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오기도 했다. 도망치지 않는 나는 더 맞아야 했다. 내가 형보다 4살이나 어렸는데도 맞는 건 똑같았다. 어머니의 회초리는 정말 매웠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맞았어도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한 직후인지, 입학하기 전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저녁이 다 되어 해가 저물어가는데도 장 보러 나가셨던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온 동네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혼자서 동네 시장까지 가고, 모든 곳을 다 찾아다녔지만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은 찾지 못하고 집에 왔는데도 안 계셨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를 보고 끌어안고 울었다.
대학을 간 후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새벽까지 놀다 들어와도, 술을 먹어도, 친구들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몸 걱정만 하실 뿐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셨다. 어릴 때는 그렇게 회초리를 때리시고, 대학 가니깐 아무런 간섭도 안 하시는 게 너무 이상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하신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해도 이제 다 나에게 맡기신다. 지금도 나는 잘못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뭐라 그러지 않으신다. 내가 하는 모든 걸 그러려니 하고 믿고 지켜보고만 계신다. 나의 모든 것을 이제는 다 포용하시는 거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왠지 가까이하기가 두렵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욕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욕하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요즘엔 남의 잘못이나 흠을 받아주는 사람보다는 찾아내어 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더 똑똑하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판단하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도덕경 16장은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허를 이루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두터이 하라.
만물이 함께 일어나는데,
나는 그것이 돌아감을 안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각 그 근원에 돌아간다.
근원에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고 하고,
이것을 제명에 돌아간다고 한다.
제명에 돌아가는 것을 그러함이라고 하고,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화를 자초한다.
그러함을 알면 관용하고,
관용하면 곧 공평해진다.
공평하면 왕이고,
왕이 되면 곧 하늘이고,
하늘이 되면 곧 도이다.
도가 되면 곧 영원하니,
몸이 끝날 때까지도 위태롭지 않다.
노자는 근원으로 돌아감을 그러함이라 보았다. 그러함이란 자연의 섭리이다. 즉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 길을 따른다는 것이다. 자연의 원리가 곧 인간의 원리라는 것을 노자는 간파했다.
그러하다는 것은 새겨야 한다. 나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두어야 그러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좁은 세계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 말 것이다. 나의 생각과 틀리다고 비판한다면 그러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의 흠을 받아주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역시 나의 흠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나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이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고치려 노력해야 한다. 나 자신부터 옳게 서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다른 이의 잘못을 찾아내기 시작하면 자신의 잘못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 다른 이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러려니 하는 가능성을 두고 포용하는 것이 노자가 생각하는 자연의 원리가 아닐까 한다.
노자가 말하는 그 근원에 돌아간다라 함은 자신에게 돌아감이 아닐까 해석해 보고 싶다. 우선 나에게 돌아가 고요히 나를 돌아보는 과정에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보다 많은 사람을 포용하다 보면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다툼이 아닌 화해와 용서의 길이 될 수 있기에, 그곳에 나의 마음의 안정과 평안이 들기 마련이다. 유교나, 도교나, 불교나 기독교의 핵심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인과 도, 자비와 사랑, 이것은 모두 사람에 대한 애착이다. 어머니를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회초리로 때리신 거고, 이제 나의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