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애정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일순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무궁무진한 변화의 연속이다. 격렬한 애정은 후에 치열한 증오로 변할 수도 있다.
격렬한 증오 역시 좋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승리를 위해 다른 이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 또한 자기 내면의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승리는 순간일 뿐 자신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다. 영원한 승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격렬한 증오가 격렬한 애정에서 올 수도 있다. 그 감정의 근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이 격렬한 증오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지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격렬한 애정의 경우에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부당함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야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얼마간의 애착을 철회하는 식으로만 그들에게 애착을 보여줄 경우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드는 것처럼 느낀다. 즉, 우리는 우리가 선택되고 우대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경우 그렇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 감사의 염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나를 그렇게 특별 취급하려는 사람에 대해서 내 마음속에 불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침놀, 니체)”
다른 사람이 나를 격렬하게 좋아하는 것 또한 좋은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은 서로 간의 건강한 관계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절제와 균형의 감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격렬하게 나를 증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이 모두 철저히 파괴될 뿐이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지만 감정에 좌우되는 경우 이성의 역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감정의 노예에서 하루속히 벗어나려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감정에 아예 무감각한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저 감정을 예쁜 꽃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특히나 격렬한 감정은 멀리해야 한다. 객관적인 시야를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너무 많이 좋아하거나 너무 증오하거나 다른 이가 나를 너무 좋아하거나 나를 너무 혐오하는 것은 삶의 무게가 늘어날 뿐이다. 물론 치열한 애증이 더 드라마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본인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누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지 말고 그저 함께함으로 만족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