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은 중국 작가 모옌이 삼십 대 초반 쓴 소설로 1920~30년대 중국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그 시대의 고통과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겪어낸 이야기이다.
모옌은 필명이며 그의 본명은 관모예이다. 초등학교 시절 문화대혁명 이후 학업을 포기하고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인민해방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서 문학에 눈을 떠 제대 후 대학에 진학해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중국인 최초로 20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천리지간의 인연이 한 줄로 꿰어지고, 한평생의 인연은 모두 하늘과 땅이 맺어주는 것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다. 위잔아오는 바로 우리 할머니의 발을 한번 잡은 것 때문에 자신이 새로운 생활을 창조하게 될 것이라는 위대한 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고, 우리 할머니의 일생도 백팔십도로 달라지게 되었다.”
붉은 수수밭은 1900년대 당시의 중국인의 삶을 대변한다. 그 수수밭을 배경으로 그들은 사랑을 하고 인연을 맺으며 그리고 가족을 이루어 갔다. 한없이 넓은 수수밭으로 그들은 생계를 유지했고 붉은 수수밭과 더불어 역사를 함께 했다.
“강 위에는 본래 작은 나무다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일본 놈들은 거기에다 커다란 돌다리를 하나 놓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큰길 양쪽에 펼쳐져 있는 널따란 수수밭이 온통 짓밟혀서 마치 땅바닥에 푸른 담요를 한 장 깔아놓은 것 같은 형색이었다. 강 북쪽의 수수밭 안에는 검은 흙이 눌려서 윤곽이 드러난 길과 그 양편으로 수십 마리의 노새들이 굴림돌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바다 같던 수수밭을 납작하게 깔아뭉개서 만들어 놓은 큼직한 공터가 하나 생겨나 있었다. 공사장 부근의 푸른 비단 휘장들은 모두 망가져 있었다. 노새나 말은 저마다 사람이 하나씩 달린 채로 수수밭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수수들이 쇠발굽 아래서 끊어지고 찢어지고 엎어지고 넘어졌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수수밭, 그로 인해 풍요로웠던 중국인들의 삶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뭉개져 갔다.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도, 가족도, 생계도 일본에 의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껍질을 벗겨라, 이 씨를 말릴 놈, 벗겨! 순씨네 다섯째는 칼을 들고 루어한 아저씨의 머리 위에 난 상처에서부터 으스슥 하는 소리를 내며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가 껍질을 바르는 솜씨는 무척 정교했다. 루어한 아저씨의 두피가 벗겨졌고, 시퍼런 눈망울이 드러났고, 울퉁불퉁한 살덩어리가 드러났다.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루어한 아저씨의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된 뒤에도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중얼중얼거리는 소리가 났고, 선홍색의 작은 핏방울들이 그의 간장빛 두피 위에서 줄줄 흘러내렸다고.”
일본군은 인간이 아닌 잔인한 악마였다. 살아있는 사람을 허공에 매단 뒤, 산 채로 사람의 생가죽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벗기게 만들었다.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전부 복종하게 만들기 위하여.
순응과 복종이 답은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꺾여진 붉은 수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그들은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형제들아 싸우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외치며 팡팡팡 하고 연방 세 발을 쏘자 자동차 꼭대기에 엎드려 있던 일본병 둘이 차의 앞대가리에 검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할아버지의 총성을 좇아 길 동서쪽의 강둑 뒤에서 몇십 발의 총성이 드문드문 울렸고 다시 예닐곱 명 가량의 일본병이 고꾸라졌다. 일본병 둘은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차 밖으로 고꾸라지더니 다리 양쪽의 시커먼 물속으로 곧장 틀어박혔다.”
강력한 일본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투쟁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터전인 붉은 수수밭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저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버지는 달렸다. 아버지의 발소리가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하고, 방금 들었던 천국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 변했다. 할머니는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한자루 한자루의 붉은 수수들 쪽으로 들려왔다. 할머니는 붉은 수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몽롱한 눈에 비친 수수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너무나 괴이했다. 수수는 신음하고 몸을 비틀고, 고함을 지르고 휘돌아 감기면서 때로는 마귀처럼, 때로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수수는 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던 뱀이 후루룩하며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또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갖가지 광채를 발하면서 빛나는 수수를 보았다. 붉은빛, 푸른 빛, 흰빛, 검은빛, 초록빛 등 갖가지 빛의 수수들이 큰소리로 웃기도 하고, 큰소리로 통곡하기도 했다. 통곡 속에서 흘러내린 눈물들이 빗방울처럼 할머니의 가슴을, 그 외로운 모래밭 위를 때렸다. 수수의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조각조각 박혀 있었다. 하늘은 너무나 높았고 또 너무나 낮았다.”
투쟁으로 인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푸르른 하늘과 붉은 수수밭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