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우리가 갈 수 있는 공간은 사람다운 삶이 가능한 곳일까? 누군가를 기쁘게 만날 수 있는 곳, 보다 나은 긍정적인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는 것일까?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해방 후 우리 역사의 객관적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 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 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 버리고, 빼앗아 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 있습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 뿐입니다.”
해방 후 한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광장은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거기서 사람들이 만나고 모든 것이 이루어 진다. 그 광장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들이 존재하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라입니까? 제가 남한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아닙니다. 무지한 형사의 고문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제 나이에 아버지 없어서 못 살 건 아니잖아요? 또 제가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여기서 활약하신다고 그들이 저를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저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거기서 탈출하신 건 옳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옳았습니다. 제가 월북해서 본 건 대체 뭡니까?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 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남한에 대한 실망으로 월북하였지만, 북한의 광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민을 위한다는 공간은 자신의 정권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껍질에 불과했다. 진정한 사람다운 삶을 위한 광장은 북한에도 없었다.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잠깐 세워 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심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만 있을 뿐, 피 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무엇을 위해 이데올로기인 것인가? 누구를 위해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인가? 사람이 존중되지 않는 이념은 한낱 하루살이 관념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헛된 망상에 속아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곡절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데 있었다. 헤겔은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옷을 벗기고, 다음에 고장 색깔을 지워 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을 뽑아낸 것이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바이블의 에스페란토 옮김이었다. 도식이란, 그것이 뛰어날수록 본뜨기 쉽다. 마르크스는 선생이 애써 이루어 놓은 알몸에다, 다시 한번 옷을 입혔다.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
우리는 실체를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기에 속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대한 인물, 위대한 사상은 의미가 없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것이 종잇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갸륵하게 져? 아무튼 잘난 멋을 가진 사람들 몫으로 그런 자리도 셈에 넣는다 치더라도 누구든 지는 것만은 떼어놨다.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주의 이름 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영웅인 척하는 사람이 판을 치는 광장, 그 광장엔 진실이 없다. 해방 후나 지금도 우리는 비슷한 광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슬픈 현실일 뿐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금만 공간만이라도 허락되는 광장이면 족하다. 그 광장에서 단 한 명만이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터인데 역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은 광장을 떠나 제3 세계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광장은 어떠한가? 내가 서 있어야 할 광장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그 광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