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였다. 과학은 인류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종교와 과학은 너무나 대립적이고 영역 자체가 달랐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교와 과학의 사이에서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버트란트 러셀의 <종교와 과학>은 인류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서로만의 영역에서 존재해온 두 분야에 대해 객관적인 시야로 그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책이다.
“종교와 과학은 사회생활의 두 측면이다. 종교는 우리가 인간의 정신사에 관해 이해하고 있는 만큼의 먼 과거로부터 중요한 것이 되어 왔으며, 한편 과학은 그리스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명멸해 오다가 16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중요성을 나타냈고, 그 뒤부터 점차적으로 인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사상과 제도들을 형성해 왔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에 있어 지적 원천이 되는 것은 교리이다. 그러나 반대파의 신랄한 공격은 교리와 교회, 그리고 교회와 도덕률의 관계 때문에 생겨났다. 교리에 관해 의문을 품는 자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수입을 감소시키기도 했으며, 더욱이 도덕적 의무란 것도 성직자들이 교리로부터 도출해 냈던 것으로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 기초를 침식하고 있는 자들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물론, 속세의 지배자들도 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혁명적 가르침을 두려워할 마땅한 이유가 있음을 느꼈다.”
종교와 과학은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임은 자명하다. 매일 함께하는 일상이기도 하다. 이 두 분야에 대해 우리는 진실되게 탐구해 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와 과학은 서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갈등의 근본 원인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교리란 무엇일까? 교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교리는 영원무궁토록 불변의 진리인 것일까? 그러한 교리가 종교와 과학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일까?
“신학과 과학 사이의 본격적인, 그리고 어떤 점들에 있어서는 가장 주목할 만한 싸움은 현재 우리가 태양계라 부르는 것의 중심이 지구냐 태양이냐에 관한 천문학적 논쟁이었다. 정통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었는데, 이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반면 태양, 달, 행성 및 항성계가 그 고유의 위치에서 그 주위를 돌고 있다. 새로운 이론 즉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의하면 지구가 가만히 있기는커녕 이중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지구는 하루에 한 번 그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또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돈다. 다윈주의는 신학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만큼이나 심각한 타격이었다. 종의 불변성, 창세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각각 독립된 많은 창조행위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명의 기원 이래로 시간의 경과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통파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또한 동물들이 주위 환경에 기막히게 적응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신의 자비에 대한 많은 논의를 버리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이제 자연선택의 작용으로 설명되었다. 최악의 경우로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유래되었다고 감히 주장했던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갈등의 대표적인 예는 천동설과 지동설에서 나타났다. 또 다른 예는 진화론이었다. 이 또한 당시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 갈등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과 진리가 밝혀지고 나게 되면 겪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혁신의 모든 논리적 결과들이 동시에 나타날 때는 습관에의 충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10년 또는 20년마다 한 단계씩 밟도록 했다면 그들은 그렇게 큰 저항 없이 진보의 길을 따라가도록 마음이 끌릴 수 있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람들은 비록 개혁에의 필요가 아주 명백하게 되었을 때 개혁의 투사로서 기꺼이 싸울 용의가 있었지만, 지적으로나 또는 정치적으로 결코 혁명가가 아니었다. 혁신가들의 이 조심스러운 기질은 19세기를 극히 빠른 진보로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과학의 발전이 상당히 빠르게 진전되기에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오래된 교리에 얽매어 있다 보면 그러한 과학적 사실조차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갈등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거기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상호 간의 조화가 가능하다.
“오늘날 지적 자유에 대한 위협은 1660년 이래의 어느 때보다 더 크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현대적 위험 때문에 전에는 교회의 권위에 속했던 신성불가침의 성격을 이어받았다. 낡은 형태의 박해가 쇠퇴했다고 만족스럽게 자축하는 것보다 새로운 형태의 박해에 항거하는 것이 과학자들과 과학지식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의 명백한 의무이다. 그리고 이 의무는 그것을 위해 박해가 일어나는 특별한 교의를 좋아한다고 해서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지적 자유가 개인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수일지 모르나, 이들 가운데 미래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의 중요성을 보았으며, 미래가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일을 하고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인류는 정체되고 이전의 암흑시대가 고대의 찬란한 시대를 이어받은 것 같이 새로운 암흑시대가 뒤따를 것이다. 새로운 진리는, 특히 권력의 소유자에게는 때로 불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과 억압의 긴 기록 가운데, 그것은 지적이지만 방종한 우리 인류의 가장 중요한 성취이다.”
중세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인류의 발전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나 앞으로의 미래에 그러한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중세 시대의 사람들처럼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러한 일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종교와 과학이 각자의 분야를 인정해 주어야 가능하다. 종교와 과학은 둘 다 인간에게 너무나 도움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두 가지는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라져 버릴 때까지 영원히 함께 할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