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날은 과거의 끝남으로 시작된다. 그 끝남에 있어서는 어두운 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새로운 날이 밝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날이 오는 것도 모른 채 그 전날의 밤을 아무런 생각 없이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문열의 소설의 <전야>는 역사의 흐름에서의 새로운 날을 위한 밤도 있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한 날들이 존재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때는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나를 위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이 규정한 가치에 충실하게 삶을 기획하고 거기 따라 숨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그래서 어느 정도 목표에 근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삶 자체가 남에 의해 기획되고 집행되는 어이없는 전도가 일어나고 이제는 화석화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육체적인 욕망과 허영을 가진 인간, 느낌과 누림같은 피와 살의 생생한 진실로 보면 얼마나 억지스러우면서도 부황한 삶일까? 자칫 유치하고 섣부른 허망감일 수도 있고 달리는 작은 성취에서 비롯된 자만의 변형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내게는 자못 절실한 회의였다.”
우리는 삶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선의 삶도 중요하지만, 삶의 소용돌이와 그로 인한 새로운 날의 열림도 중요하다. 아무런 인식 없이 우리는 새로운 날들을 맞고 있다. 우리의 어두운 날들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날이 지나간 날들과 같아질 수도 있다. 삶의 흐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선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나이는 이제 더 이상 젊음을 주장할 수 없고 따라서 젊음에 바탕한 여러 즐거움과 누림도 내 삶의 기획에 더는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된 때에, 특히 사랑이나 여성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은 그대로 망령이 될 수도 있는 시기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 커피를 마시면서 내 연구실을 꼼꼼히 돌아보는 그녀의 호기심과 선망 어린 눈길에서 나는 이미 내 삶의 마지막 축복과 마주하고 있다는 환상까지 품었다.”
우리는 삶의 구석에서 새로운 삶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한 삶을 열어주는 만남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누군가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떠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간들에 용감하게 마주 서야 한다. 그러한 선택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는 삶의 주인이 자신이 해야 할 뿐이다.
“한때의 거품에 취해 양양 거리다가 거덜 난 양장점 주인이 연말 대목까지 소홀히 해서야 쓰겠습니까? 또 다른 거품일 성싶은 제 유학 건도 다시 생각해볼 작정입니다. 다만 우리 일만은 저 홀로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해 선생님의 뜻에 맡기고 이렇게 먼저 떠납니다. 문득 그 불행한 사업가가 그제 술집에서 한 말이 떠오르는군요. 우리 사랑에도 지금이 새로운 날의 전야인지 진정한 어둠은 아직 뒤에 남은 한 시대의 마지막 밤인지 통 알 수가 없네요.”
삶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도 자신의 뜻대로 가지 않기도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기대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다가도 잘못됨을 깨닫기도 한다. 자신의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기 가기도 한다.
삶은 그래서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한 삶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날이 희망의 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한 날들이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을지라도 삶은 소중하다. 새로운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희망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