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칠레의 비쿠냐에서 태어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16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녀는 15세부터 교사 일을 시작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시를 써서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곤 했다.
이 시절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철도 노동자였는데 어떤 어려움으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커다란 고통을 경험하고 한때 자신 또한 자살을 생각했으나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주위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로 한다. 이때 그녀가 자신의 아픈 상처와 고통을 모아 쓴 시가 죽음의 소네트이다.
이후로 시집 비탄, 부드러움 등을 발표하고 남미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후에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에서 대학 교수 그리고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에서 외교관의 일을 하기도 했고 나중에 국제연합의 중남미 대표로 활동했다. 이후 미국, 멕시코, 이탈리아에서 영사로 일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경험한 그녀의 사랑의 상처는 그녀가 더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돌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어머니 같은 따스함으로 대해 주었고, 외교관 활동을 하면서 가난한 어린이들과 부당한 박해를 받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그녀의 아픈 상처는 그녀를 사랑에 있어 종교적인 경지로 이끌었다.
또한 많은 학생을 가르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의 학생 중 한 명이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이다. 그녀 또한 194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는 남미 출신 최초의 노벨 문학상이었다.
<죽음의 소네트>
인간들이 집어넣은 얼어붙은 틈새로부터
태양이 비치는 겸손한 대지에
나, 그대를 내려놓으리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대지 위에 나는 잠들지니
그대와 나는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워야만 하니.
잠든 아기를 위한 자상한 어머니와도 같이
태양이 비치는 대지에, 나 그대를 잠재우리.
고통스러운 아기와도 같은 그대 육체를 안음에 있어
대지는 부드러운 요람의 구실을 하리.
그 뒤 나는 떠나리.
푸르스름한 연한 달빛에
가벼운 폐물들이 차근차근 쌓여 갈 때
나는 이곳을 떠나리
아름다운 복수를 찬미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여하한 손길도
그대의 한 줌의 뼈를 탐내어
이 남모르는 깊숙한 곳에 내려오지 못하리.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사랑의 깊이를 알게 해 준다. 깊이 있는 이러한 사랑이 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많은 사람을 돌볼 수 있는 박애적인 사랑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사랑은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 사랑이 순수할수록 받아들임과 용서, 포용으로 더 많은 사람을 품어주는 따스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