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은 나를 벗어나 다른 내가 되었을 때 그것에 만족하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현재의 나의 삶이 바뀌기를 갈망한다. 현재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내가 다른 나로 돼버린다면 그 세계에서 나의 삶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 세계에서 나의 삶에 만족할 수 있으며,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
“지금에 와서는 선장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버리면서부터 내 인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쓰려하면서, 안갯속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터키 함대들의 색깔을 그려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기에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호자는 우연히 알게 된 자기와 닮은 사람을 자신의 노예로 삼는다. 서양을 동경하던 호자는 이탈리아 출신인 자기 노예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서양 출신이었던 노예처럼 되고 싶어 한다. 비록 자신의 노예였지만 서양을 동경하는 호자는 서양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던 자신의 노예가 부러웠다. 그렇게 호자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노예에게 말을 하고 결국 서로를 바꾸어 호자는 이탈리아로 노예는 터키에서 각자의 인생을 바꾼 채 살아가기로 한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삐걱거리면서 집 안을 돌아다니던 발소리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마치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는 듯 ‘왜 나는 나일까?’라고 말했을 때, 나는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호자에게 왜 그가 그인지를 모른다고 말한 후, 그 문제는 그곳에서, 내가 살던 나라의 사람들이 굉장히 자주 묻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묻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호자는 왜 나는 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자 노력했고,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보다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쫓아 현재의 자신을 버리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버리고 자신이 동경하는 바를 쫓아 살아가게 된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면 살게 될 수 있는 것일까?
호자의 노예는 주인의 뜻에 따라 자신 또한 호자로 살아가야 했으나 자신의 인생의 길이 바뀌었을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실존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삶은 어떻게 주어지든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에 의해 삶은 변할 수 있다. 내가 바뀐다고 해서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바꿀 수 있는 내가 더 중요할 뿐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어떤 상황이건 무엇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나 자신이나 조건이 바뀐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호자의 노예는 말한다. “어쩌면 몰락이란 우월한 사람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일 뿐이다. 그 외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