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역사의 흐름 속에서

by 지나온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태고’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니에비에스키 가족 3대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태고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안정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 경계 너머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삶에는 항상 선과 악같이 질서와 혼란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질서와 조화를 스스로 찾아가면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태고’라는 공간의 시대적 배경은 세계 대전, 유대인 학살, 폴란드의 공산화, 사유재산의 국유화, 전후 냉전 체제, 폴란드 자유 노조에 의한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올가 토카르추크의 조국인 폴란드의 사회상을 모두 담았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시대적 상황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미하우는 병들어 쇠약했고, 더러웠다. 검은 수염이 얼굴을 뒤덮었고, 머리에는 이가 득실댔다. 패전국의 찢긴 군복이 막대기에 걸린 것처럼 몸에 걸쳐 있었다. 미하우는 차르의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번쩍거리는 단추를 빵과 맞바꾸었다. 또한 열병과 설사에 시달렸으며, 자신이 떠나온 세계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근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전쟁이란 현실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내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며 내가 죽을 뿐이다. 인간이 아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만도 기적일 뿐이다.


“플로렌틴카는 별다른 사유도 없이 광기에 사로잡혔고, 이유 없이 미쳐버렸다. 한때 그녀에게도 광기의 원인이 될 만한 일들이 있었다. 술 취한 남편이 백강에서 익사했을 때, 아홉 자녀 중 일곱을 잃었을 때, 유산에 유산을 거듭했을 때, 유산하지 않은 아이를 지웠을 때, 두 번의 유산의 위험으로부터 가까스로 아이를 지켰을 때, 헛간이 모조리 불탔을 때, 그녀에게 남은 두 아이가 그녀를 버리고 세상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삶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러한 운명을 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게이머는 얼음판 위에 갈라져 있는 금을 보듯 자신의 길을 본다. 그 길은 마치 어지러운 속도로 사방을 향해 뻗어나가고, 구부러지고, 이리저리 방황을 바꾸는 선과 같다. 아니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대기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번개와도 같다. 신을 믿는 게이머는 그 길을 가리켜 ‘신의 판결’ 또는 ‘신의 손가락’이라 말한다. 전능하고 위대한 창조주의 손끝이 여행자를 이끌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을 신봉하지 않는 자라면 ‘우발적인 사고’ 또는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것이다. 게이머는 종종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 작은 목소리로, 혹은 확신 없이 말할 것이다.”


삶은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은 그렇게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인간은 이러한 운명이라는 굴레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SS 부대가 예수코틀레에서 유대인들을 소탕하는 것을 그의 부대원들도 도왔다. 쿠르트는 유대인들을 트럭에 태우는 것을 감시했다. 그들이 더 나은 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실이나 다락방 숨어 있는 유대인 도피자들을 수색하고 공유지에서 공포에 질린 여인들을 쫓아가 아이를 잡은 손을 떼어놓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쿠르트는 유대인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때로는 직접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참히 학살을 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서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죽음의 날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 힘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다.


“얼마 뒤 숲이 국유화되는 바람에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했다. 아바는 외국으로 떠났다. 작별 인사를 하러 보스키를 찾아왔고, 두 사내는 형제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파베우 보스키는 인생에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주변 환경 또한 완전히 바뀌었다. 주사를 놓는 일만 해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국가는 깡패 인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라는 명목 아래 국가의 권력으로 개인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국가에게 권력을 부여했는가? 그 권력의 오만함이 언젠가는 파멸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하지만 당한 사람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아무런 힘도 없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제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벅찰 뿐이었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에서 개인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역사의 뒤안길에서 우리 인간은 어쩌면 희생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닌 역사의 부속품 정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태고의 시간들은 그래서 슬픈 순간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KakaoTalk_20211124_103956841.jpg


작가의 이전글왜 나는 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