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놀라면서 얘가 뜬금없이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고는 큰애가 한 마디 더했다.
"아빠가 나 어렸을 때 10살 되는 어린이날엔 내가 갖고 싶은 거 다 해준다고 했으니 약속 지켜."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뜨끔했다. 그리고 너무 놀랐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큰애가 네 살인가 다섯 살쯤에 열 살이 되는 어린이날에 원하는 거 뭐든지 꼭 해준다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아니, 얘가 그 어렸을 때 했던 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얼떨결에
"어떤 강아지 사줄까?" 물었다.
"진돗개, 우리나라에서는 진돗개가 젤 좋은 거래."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하지 하면서도
"그래. 알았어. 아빠가 진돗개 사줄게."
하고는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속으로 고민을 하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처음에 아내는 안된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어떻게 진돗개를 키우냐, 감당이 안될 거라며 반대를 했다.
나는 아내를 계속 설득했다. 온갖 말을 다 동원하여 일주일 이상을 설득했다. 아내도 어쩔 수 없는 듯 결국은 승낙을 했고, 진돗개를 어떻게 사야 할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왕 사는 거 진돗개니까 진도까지 가서 사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진도에 가서 진돗개를 살까 하다가 남해 쪽은 우리 가족이 가본 적도 별로 없으니 이번 어린이날은 그쪽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5월 4일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일찍 퇴근했고 큰애가 학교 끝나자마자 세 아이와 아내를 차에 태워 진도로 향했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 여섯 시간 이상이나 더 걸렸다.
진도에 도착해서 우선 전문적으로 진돗개를 분양하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정말 진돗개가 엄청 많았는데 전문분양업체답게 튼실한 새끼 진돗개들이 수십 마리가 있었다. 가격을 물어보았다. 주인은 자신이 분양하는 진돗개는 족보까지 다 있는 것들이라고 하며 최소가 50만 원이라고 했다. 아내한테 물어보니 강아지 한 마리에 50만 원은 너무 비싸다고 했다. 아이들은 진돗개들이 귀여운지 마냥 쳐다보며 재밌어했다. 난 그냥 50만 원이라도 주고 사주고 싶었지만,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분양하는 주인한테 좀 더 싸게 진돗개를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럼 전문업체를 가지 말고 진도에는 개인적으로 진돗개를 키우는 집들이 워낙 많으니 진돗개 새끼 낳은 집에 가서 개인적으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어쨌든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시 가족을 태워 진도읍으로 갔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진돗개를 쉽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진도읍에 갔더니 쌀 파는 가게에 진돗개 새끼가 한 마리가 있어서 주인한테 물어보니 팔 수 있다고 하면서 족보도 들고나왔다. 근데 강아지가 이미 많이 커서 귀여운 면이 없었다. 아이들을 쳐다보니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집 주인한테 서울에서 왔는데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진돗개 새끼를 사려 하는데 어디 가면 새끼들이 많은지 물어보았다. 그 주인은 진도 장날엔 진돗개 새끼들이 장에 많이 나오는데 2일하고 7일이 장날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은 4일이었다. 7일까지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내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진도읍 주위 민가가 있는 마을로 차를 몰았다. 그냥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녀 봤는데, 진돗개들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집에 사람 없는 곳도 많았고 있어도 팔지 않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해가 떨어져 어둑어둑해져서 일단 진도읍으로 다시 가서 여관을 잡고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여관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은 쉬고 있으라고 하고 나 혼자 다시 차를 몰아 근처 다른 동네로 가보았다. 그 동네는 길이 좁아 차로 다니기가 불편해서 동네 어귀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혹시 진돗개 새끼가 있나 싶어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강아지 여러 마리가 짖는 소리가 들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보았다.
'어, 근데 이게 웬일인가?'
어떤 집 옆에 텃밭이 있고 그 텃밭엔 개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강아지 네댓 마리가 짖으며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살금살금 가서 그 개집 안을 몰래 들여다봤는데 너무 이쁜 강아지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좋아할 예쁜 진돗개 새끼들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거다."
하고는 그 집 주인을 만날 요량으로 집 안 마당을 보았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주인과 만나고 싶어 그 집 앞에서 30분 정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영 사람이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마침 이웃 주민이 지나가길래 물어보았더니 집주인이 어디 간 거 같다며 내일 아침에 와보라고 했다. 나는 너무나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여관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나한테 달려왔다.
"아빠, 진돗개 새끼 있어? 찾았어?"
"응, 아빠가 찾았는데 주인이 없어. 낼 아침에 아빠가 주인한테 가서 물어봐야 돼."
아이들은 좀 실망하면서도 낼 가보면 된다는 마음에 안도하는 듯했다. 불을 끄고 아이들을 재우고 누웠는데 아까 봤던 강아지 중 한 마리라도 사서 아이들 품에 안겨주고 싶은 마음에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나 그 집 주인이 아침에 나가기 전 만날 생각으로 대충 씻고 나오려는데 큰 애도 자기도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얼른 차를 몰아 동네 어귀에 주차를 하고 큰 애 손을 잡고 그 집으로 향했다. 그 집 문밖에서 마당을 보니 인기척이 있었다.
나는 너무 이른 아침이었지만
"계세요?"
하면서 집주인을 불러보았다.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너무 반가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주인도 잘 되었다며 강아지 새끼가 한 달 조금 지나 이번 장날에 내다 팔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개집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며 한 마리 골라보라고 했다.
큰애가 강아지들을 보더니
"아빠 너무 이쁘다. 이거 사줘."
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인한테 얘기를 하고 큰애와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아내와 둘째 셋째를 차에 태우고 그 집으로 다시 갔다. 세 아이가 모두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보더니 그중에 하얀 백구 한 마리를 골랐다.
집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었더니 십만 원만 달라기에 얼른 십만 원을 집어주고 강아지를 안아 아이들과 함께 차에 태웠다. 차에서 아이들은 강아지를 만져보며 난리가 났다.
"강아지 이름을 뭐라고 하지?"
서울로 오면서 우리는 이름을 진돌이로 지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 진돌이가 같이 살게 되었다.
하얀 백구인 진돌이는 눈이 몽실몽실한 게 너무 이쁘고 착했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면 진돌이를 데리고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서 한참을 놀았다.
어떤 날은 아이들과 함께 진돌이를 데리고 동네 여기저기도 다니며 맘껏 놀았다. 진돌이도 우리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고 아이들을 무척 잘 따랐다. 세 아이와 진돌이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천국이 따로 없는 듯했다.
진돌이는 정말로 예쁘고 착하고 영특했다. 진돌이를 키우다 보니 비록 짐승이지만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에 진심으로 놀랐다. 그런데 진돌이는 너무 빨리 컸다.
몇 달이 지나자 진돌이는 덩치가 금방 커져서 이미 내 허리까지 왔고 아이들이 끌고 다니기에도 벅찰 정도로 되어 버렸다. 아침저녁으로 데리고 나와 산책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일 년이라도 아이들과 같이 지내게 해줄 요량으로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일 년 정도가 지나자 감당에 한계가 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들한테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하면 그때 진돌이를 다시 데려오기로 하고 시골 부모님이 잘 아시는 분께 진돌이를 맡겼다. 나도 잘 아는 분이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 후 가끔씩 아이들이 진돌이를 보러 가자고 나한테 얘기했지만 가지 못했다.
진돌이를 보는 건 좋으나 보고 나서 다시 또 헤어지려면 마음도 아플 것 같았다. 진돌이도 아이들이 오면 좋겠지만 다시 아이들이 떠나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몰라 그냥 내가 무마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살다 보니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던 중 갑자기 진돌이를 맡아주셨던 분한테 연락이 왔다. 진돌이한테 좀 와보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가는 동안에 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도착해보니 혹시나 했던 일이 벌어져 있었다. 진돌이가 10살이 넘었지만 좀 더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하는 걸까? 세월이 이리도 빨리 지나간단 말인가? 그 많은 세월 나는 왜 진돌이에게 가보지도 못했던 것일까?
이제는 아이들한테 마당 있는 집을 구해 아이들과 진돌이가 함께 뛰어놀게 해준다는 약속을 이젠 지킬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속상했지만 이제 방법이 없었다. 조용히 그분께 말씀을 드렸고, 근처 양지바른 나무 옆에 구덩이를 조그맣게 팠다. 그 구덩이 안에 신문지를 깔고 진돌이를 놓고 다시 신문지를 덮고 흙을 끌어모아 진돌이를 묻었다.
금붕어를 키우다 죽으면 아이 셋을 데리고 아이들 초등학교 화단을 파고 금붕어를 묻듯 그렇게 진돌이를 묻었다. 다 묻고 나니 갑자기 다리가 풀렸다. 그냥 땅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동물도 영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돌이가 하늘나라에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속으로
"거기서 잘 놀고 있어.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오랜 시간이 남아있으니 내가 너를 먼저 보러 갈게. 거기서 그동안 같이 못 놀았던 거 실컷 놀아줄게."
아이들이 진돌이를 사랑했던 것만큼 나도 진돌이를 사랑했던 것 같다. 진돌이 묻힌 땅을 보니 큰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돌이는 강아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야."
사랑은 존재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건 같다는 생각이 났다. 갑자기 아이들과 진돌이가 놀이터에서 같이 뛰어놀던 모습이 떠올랐다. 뛰어놀며 크게 웃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렸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