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성 >
두 개로 나누는 순간
아픔과 고통은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내가 좋아하는
내가 생각하는 근원과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내가 싫어하는
내 생각과 다른 근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두 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거늘
두 개로 나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 개로 나누는 것 자체가
오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상시 살아가면서 아무 개념이나 관념 없이 무언가를 나누거나 분류한다. 예를 들어 너와 나, 너희와 우리, 우리 학교와 다른 학교, 우리 회사와 다른 회사,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근원을 대체로 두 개로 나눈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근본이 두 개 존재하는 데 이를 이원성이라고 한다.
이원성(二元性, Duality)을 좀 더 엄밀히 정의한다면 사물을 이루는 두 개의 다른 근본 원리가 갖는 성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른 근본 원리를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한다면, 그 근본 원리 중 하나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 쉽게 예를 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두 개로 나누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굳이 두 개로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정말 두 개로 나누어야 맞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아무 의식이나 생각 없이 분별하여 두 개로 나누어 버린다. 여기서 아픔과 고통이 당연히 동반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 모든 일에서 행복이나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 어떠한 성취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기쁠지 모르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버리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 반은 나의 반대 측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나는 그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세상의 반쪽은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유도 없고 나누어야 할 목적도 모른 채 그저 관습과 인습에 매여 그것에 따르며 살아왔기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 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그 정확한 기준도 없이 그저 나누어 놓았더니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와 고통이 우리 삶의 커다란 멍에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문제는 그 멍에를 스스로 내려놓지도 못하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운명에 있다. 그 운명에 맞서 우리는 이제 그 멍에를 진정으로 내려놓지는 못할지라도 깊이 있게 생각하여 현명한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나와 너라는 세계를 조금씩이라도 허물기 시작하면 그만큼 우리는 삶의 자유로움을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형이상학적 철학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발원한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그리고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된 사물을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핵과 본질에 그것의 기적적인 근원을 상정함으로써 이 난점을 극복해왔다. 반면, 모든 철학적 방법들 중에서 가장 젊고, 더는 자연과학과 분리될 수 없는 역사철학은 개별적인 사례들을 관찰함으로써 어떠한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러한 반정립은 추론의 오류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모든 선한 동기들은 아무리 고상한 이름을 갖다 붙인다 해도 사실은 독이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동기들과 한 뿌리에서 자란 것이다.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는 전혀 다른 행위가 아니다. 그 둘 사이에는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선한 행위는 승화된 악한 행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평상시 느끼는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단순하게 그 기준이나 이유도 없이 두 개로 나눈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답은 간단하다.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러한 분별에 진정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지 모른다.
오늘 나는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 그는 “나쁜 사람”,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런 적은 없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직도 분별, 즉 이원성의 오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된 개념의 노예로 살았던 것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 그는 나에게는 그 후로 계속해서 나쁜 사람으로 남는 것이고, 누군가를 착한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그는 나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믿었던 착한 사람으로부터 나는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나쁜 사람으로부터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원성의 오류에서 기원한다. 다른 사람이 하듯 쉽게 나도 이러한 이원성의 오류를 검토조차 하지 않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책임은 오로지 내가 짊어져야 할 뿐이다. 세상은 두 개로 나누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도 두 분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일 뿐이며 사람은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내면의 자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오류를 찾아내어 하나씩 없애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