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로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조절하여 원자로를 만든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과학자 엔리코 페르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수재로 통하였다. 그는 21살 때 박사학위를 받았고 25살에 로마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33년 그는 베타붕괴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이는 베타붕괴에 있어서 전자와 함께 방출되지만 실제로 검출하기 어려운 입자의 존재를 가정하여 베타붕괴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입자는 나중에 페르미에 의하여 중성미자로 불려졌다. 페르미는 중성미자에 의한 문제를 풀기 위해 소위 약력으로 불리는 새로운 힘을 제안하였다. 이 약력은 나중에 자연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기본적인 힘으로 인정되었다. 이 업적으로 페르미는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에 참여한 후 그의 아내가 유태인이었기에 고국으로 돌아가면 아내가 위험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는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고 이후 수많은 논문을 써내며 당대 최고 물리학자의 반열에 오른다.
페르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카고대학 물리학 건물이 있는 지하에 그의 지도로 인류 최초로 핵분열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원자로를 만든 것이다.
페르미가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에 독일의 과학자인 오토 한은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였다. 페르미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열쇠는 너무 많은 중성자들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흡수될 수 있도록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데 있었다. 마침 컬럼비아 대학에는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인 실라드가 이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페르미와 실라드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실험하기 위해 원자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고, 원자로의 감속재로는 흑연이 적당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페르미 연구팀은 1940년부터 높다란 흑연 파일을 만들고 여러 지점에서 중성자의 세기를 측정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페르미는 1942년 11월부터 핵분열 반응을 안정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원자로를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극반경 309cm, 적도반경 388cm의 타원형으로 제작되었다. 반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원자로를 흑연 벽돌로 만들었고, 카드뮴 막대로 빈틈을 채워 원자로를 통제하게 했으며, 반응 물질로는 순수 우라늄과 산화우라늄을 사용하였다. 그 원자로는 시카고파일 1호기로 불렸다. 1942년 12월 2일 드디어 인류 최초로 원자로를 가동하는 실험이 실시되었다. 원자로에서 카드뮴 막대를 인출하자 연쇄반응이 시작되었고 그 반응은 계획대로 조절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핵분열로 인해 나오는 핵에너지를 인류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