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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Dec 25. 2021

자신을 못 박고

 1891년 스웨덴 벡셰에서 태어난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웁살라 대학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삶의 공허와 혼돈에 대한 작품을 썼다. 그는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나치스에 대항하여 북유럽 문학의 양심적 작가로 알려졌다.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바라바>는 예수님 대신 풀려나서 사형을 면한 사람으로 그가 참된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총독 관저의 뜰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바라바는 그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 말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바라바는 이전에 그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바라바가 그 사람한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땅굴 감옥에서 막 나온 그의 눈이 빛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은 찬란한 빛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빛은 곧 사라졌다. 바라바의 시력은 차차 정상으로 돌아왔고 관청 뜰에 홀로 서 있는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물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바라바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매우 이상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자기처럼 죄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사형을 당할 죄수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재판을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무죄라는 것은 분명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죄인 두 명중 한 명은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한 명을 택하라고 한다. 이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가 못 박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한다. 바라바는 살인을 저지른 증거가 확실한 데도 빌라도는 군중의 요구를 할 수 없이 들어주었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이미 나이를 먹어 둔해진 엘리아후가 바라바를 죽일 생각으로 칼을 가지고 기습했으나 치열한 격투 끝에 결국 바라바가 엘리아후를 굴 앞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젊은 바라바 쪽이 훨씬 날새고 몸에 탄력이 있었다. 엘리아후는 힘은 세었으나 바라바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싸움을 건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운명을 재촉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이 엘리아후가 바라바의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며,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바라바의 어머니는 여러 해 전에 산적들이 여리고에서 대상을 습격했을 때 붙잡은 모아브 지방의 여자였다. 산적들은 이 여자를 예루살렘의 사창굴에 팔아버렸다. 그러나 그 여자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자 포주는 그 여자를 더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보따리를 싸게 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길에서 아기를 낳고는 죽어버렸다.”


  바라바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기의 어머니는 그를 길에서 낳다가 죽었고, 나중에 커서 우연히 싸움으로 인해 살인을 했는데 그가 죽인 사람이 자신의 친부였다. 


  “이제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그 구세주 때문에 죽어,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이번 사람은 진짜 구세주일까? 그 사람이 진짜 메시아일까? 전 세계의 구세주일까? 전 인류의 구세주일까? 그 사람이 구세주라면 왜 그녀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돕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왜 그녀가 그 때문에 돌에 맞아 죽게 내버려 두었을까? 그가 구세주라면 왜 구하지 않았을까?”


  바라바는 사형을 면하고 감옥에서 나와 우연히 언청이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다가 이교도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아 죽게 되고 만다. 이에 바라바는 많은 내적 혼란을 겪게 되고 진정한 신앙과 사랑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겐 이 사람을 벌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과오와 단점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에게 그를 벌할 권리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힌 것처럼 자신을 버리는 데 있다. 자신을 주장하고 본인의 입장과 이익을 따지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에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어떠한 모습이건 간에 온전히 받아들임이 기본이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본인도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기대하거나 사랑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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