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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Dec 29. 2021

누구에게 종속된다는 것

1946년 오스트리아 슈타이마르크에서 태어난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어려서 음악에 재능을 보여 빈 대학교에서 음악, 연극, 미술을 공부하였으나 졸업 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1967년 시집 <리자의 그림자>를 시작으로 소설 <우리는 새끼들이다>를 출간하였고, 이후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나치 전범 청산 운동 등 정치활동도 하였으나 1991년 자유당 집권 후 정치활동은 그만둔다. 2004년 “비범한 언어적 열정으로 사회의 진부한 사상과 행동, 그것에 복종하는 권력의 불합리성을 잘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주인공 에리카 코후트를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철저한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켰던 어머니와 딸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주인공 에리카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있어 아버지를 대신하는 위치가 된다. 어머니와 딸은 부부처럼 한 침대에서 자고 정신적으로 서로에게 남성의 대리 역할을 한다. 어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딸에게 더욱 집착을 하게 되며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리카는 몸부림친다. 


  “낙엽 더미가 바람에 휙 날리듯 에리카는 쏜살같이 현관문을 지나 어머니 눈에 띄지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벌써 어머니가 그 앞에 턱 버티고 서서 에리카를 붙들어 세운다. 국가와 가정에서 만장일치로 공인된 이 어머니라는 지위는 종교 재판장의 심문권과 총살 집행자의 명령권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왜 이제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오게 되었느냐고 캐묻는다. 피아노를 배우는 마지막 학생이 에리카한테서 잔뜩 비웃음을 사고 벌써 세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을 텐데 말이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에리카의 모든 일상에 관여하고 있다. 에리카 없이는 어머니는 살 수 없고, 에리카 또한 어머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에리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이가 들어 30대 중반이 넘도록 그런 관계는 유지되어 왔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두 모녀는 서로 의지한 채 그렇게 살아왔다. 


  “딸은 다시 돌아와 벌써 흥분해 울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를 천박한 사기꾼이라고 욕하면서도 어머니가 다시 자기와 화해할 것을 바란다. 에리카가 어머니를 때렸고 머리카락을 뽑았으니 에리카의 손모가지를 잘라내야 한다고 어머니는 외쳐댄다. 에리카는 점점 소리 높여 훌쩍거린다. 자식을 위해 살과 뼈를 깎아 바치는 어머니가 머리칼까지 뽑힌 마당이니 에리카도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뭐든 어머니 뜻을 어기고 나면 에리카는 늘 마음이 아프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간섭에 숨이 막힐 때도 있어서 가끔씩 어머니에게 반항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은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화해만을 바랄 뿐이다. 두 모녀는 서로 깊이 사랑하기에 불협화음이 생기는 경우 빠른 시간 안에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서로가 편할 수밖에 없다.


  “얌전한 침묵 속에서 에리카는 버터 백이십오 그램을 산다. 그녀는 아직 어머니가 있으니 남자와 결혼할 필요가 없다. 두 사람에게 새로운 가족이 하나 생기면 그는 당장 내쳐지고 소외당할 것이다. 그 인물이 예상대로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판명되는 날이면 즉시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난다. 어머니는 가족 구성원이 되려는 사람들을 망치로 두드려보고 하나씩 하나씩 추려낸다. 솎아내고 거절하고 시험해보고 버린다. 이런 방법을 쓰면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기생족들은 생길 수가 없게 된다. ‘우리끼리만 사는 거야, 에리카야, 우리는 그 누구도 필요 없지 않니?’”


  에리카는 성장해 대학을 다녔고 대학 졸업 후 자기 일을 갖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에리카 사이에 그 어떤 남자도 끼어들 수 없었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은 오히려 집안의 평화에 파문만 일으킬 뿐이다. 어머니 또한 남편이 오래전에 죽었지만, 에리카에게 집착할 뿐이다.


  “들꽃 에리카. 그녀 이름은 이 꽃 이름에서 딴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눈앞에는 수줍어하는 어떤 존재, 부드러운 어떤 것이 아른거렸다. 자기 몸에서 빠져나온 진흙 덩어리를 보았을 때, 어머니는 순수하고 섬세해지라고 여기서 한 조각, 저기서 한 조각씩 떼어내면서, 가차 없이 그 진흙 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잡아끌지 않으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더러운 것과 오물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머니는 일찍부터 에리카를 위한 예술적인 직업을 찾고 있었는데, 그건 평범한 다른 사람들이 이 예술가 주위에서 경탄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내는 동안 노력으로 이룩한 품위 있는 예술성으로 돈을 짜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에리카는 완전히 길들여졌으니 음악이라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그 자리에서 운행을 개시하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의 의도대로 에리카는 성장해 간다. 비록 피아니스트로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남은 생을 보내면 된다. 


  에리카는 어머니의 집착에서 해방되고자 자신이 가르치는 젊은 남자와 일탈을 꿈꾸고 이를 실행한다. 하지만 그 일탈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커다란 상처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훨씬 편하고 고향 같기 때문이다. 이제 어머니와 에리카는 홀로 독립적인 삶은 불가능하고 철저히 종속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에 집착하고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편하고 의지가 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또한 가까운 주위의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집착하고 있기도 하다. 


 함께 하는 삶과 종속적인 삶은 분명히 다르다. 인간관계는 소유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며 주위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으로도 우리의 일생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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