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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Feb 20. 2022

정지용과 육영수 여사 생가

https://youtu.be/h8V3bm8ioGM


아버지 고향은 충북 영동이다. 속리산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다. 영동 바로 옆이 옥천이다. “향수”라는 시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 옥천이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옥천에도 자주 다니셨다고 한다. 일가친척들이 영동과 옥천에 많이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 시인은 항렬로 따지면 아버지의 손자뻘이다. 물론 먼 친척이긴 하지만 해방 전에는 일가이기에 모이기도 했었던 것 같다. 


  긴 겨울이 계속되어 부모님이 집에만 계셨기에 조금은 답답해하실 것 같았다. 주말에 바람이라도 쐬어드리기 위해 정지용 생가를 가기로 했다. 집에서 40분 정도만 가면 되니 부모님에게 그리 부담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정지용의 시 “향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온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아닐까 싶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에겐 꿈에도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곳, 그곳이 이 지구상 어딘가에는 있다. 모든 아픔과 설움을 잊을 수 있는 곳,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무슨 일과 상관없이 그저 받아주는 곳, 그런 곳이 어딘가에는 있다.


  그리움이 있는 곳, 모든 것이 소중한 곳, 하지만 그리 특별하지는 않은 곳, 단지 나의 마음에 합한 곳,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어릴 적 함께 했던 것들이 있는 곳, 너무나 익숙해 하나도 불편함이 없는 곳,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는 곳, 그저 모든 것이 전부인 듯한 그러한 곳이 어딘가엔 있다.


  정겹고 푸근한 곳, 가난할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부자일 수 있는 곳, 내가 마음껏 뛰어놀고 거침없이 뛰어다녔던 곳, 푸른 하늘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에게는 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 따스한 손을 잡고 함께 다녔던 사람들, 밤하늘의 별을 세어 가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곳, 그곳이 우리에겐 있다.


  떠났지만 떠날 수 없는 곳,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찾는 곳, 그리고 나의 뼈를 묻어야 하는 곳, 그곳이 이 지구 상의 어딘가에 우리에게는 있다.     


날씨가 아직 조금은 쌀쌀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정지용 생가로 향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옥천읍 한복판에 생가가 있었다. 주위의 모든 집들은 다 바뀌었지만, 오직 정지용 생가만 초가집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집의 규모는 사실상 아주 작다. 초가인 방 3칸 본채와 방 2칸 별채가 전부였다. 우물과 장독대만 소박하게 있을 뿐이다. 군에서 깨끗하게 잘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가 옆에는 조그마한 정지용 문학관도 세워져 있었다. 문학관 안에는 그의 시집과 동인지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찍은 정지용 시인의 사진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문학관을 둘러보고 부모님 사진도 많이 찍어드렸다. 


 정지용 생가 바로 근처에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한번 가보자고 하셨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규모부터 달랐다. 대지가 3,500여 평이 넘는 집으로 조선시대에 이 집에서 정승 3명이 살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방치되어 있다가 얼마 전에 다시 전면적으로 수리해서 시민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고 한다. 본채에는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있고, 살아계셨을 때의 사진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시 여러 편도 액자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둘러보며 부모님께서 60, 70년대를 회고하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도 서거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갔는데 우리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두 길거리 나와 땅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울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들어가 어머니께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돌아가셔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어린 나이에 박정희 대통령 부인이 왜 죽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했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육영수 여사 장례식 때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가서 그 장례식을 한참이나 보았던 것 같다. 나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그 장례식 장면을 보았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흐느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삶은 한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 커다란 영광과 영화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다 지나가 버리고 만다. 물론 그러한 것을 누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운명은 삶을 그리 순탄하게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육영수 여사 생가를 다 둘러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매운탕을 먹으러 갔다.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서 이곳은 민물고기 요리가 유명한 듯했다. 도리뱅뱅 하나와 매운탕을 주문해서 부모님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께서는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육영수 여사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일제 강점기부터 살아오시면서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모든 대통령의 모습들을 다 보셨을 것이다. 대통령의 뒤엔 항상 영부인도 있기 마련이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은 없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가만히 나이 드신 분들의 말씀을 들어 보면 사실 육영수 여사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있으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텐데 지금 봐서는 새로운 영부인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육영수 여사 같은 그런 좋은 말들이 들릴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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