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온 시간들 Feb 20. 2022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 뒷산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된 성공회 교회가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마 조선 시대 말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기와지붕이 얹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와집도 아니고 서양식의 집도 아닌 좀 오묘한 분위기의 건축 양식이었다. 그 안이 너무 궁금해서 창문 밖에서 한번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시내에 있는 천주교 성당 같은 분위기였다. 


  그 성공회 교회 주변으로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나물을 마음껏 뜯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시간이 되는 대로 그곳에서 많은 나물을 캐서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솔직히 말해 어머니가 나물을 캘 때 내가 옆에서 조금은 도와드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물은 조금만 캐고 어머니 주위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그때 당시의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는 솔직히 식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는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나물이건 꽃이건 나무건 다 거의 비슷해 보일 뿐이다. 아주 특별한 모습을 가진 식물이거나 자주 본 것이 아닌 경우에는 구분을 잘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많은 종류의 나물을 다 구분해서 때에 맞게 뜯어서 집으로 가져와 맛있는 반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는 귀신이 곡할 노릇 같았다. 어떻게 저리 비슷한 것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골라서 캐고 그것을 집에서 다른 종류의 먹을 것으로 만드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어머니의 나물 요리는 쑥떡이었다. 뒷동산에는 쑥이 정말 많았다. 날씨가 따뜻해진 봄에는 쑥을 캐고 또 캐도 줄어들지 않는 것인지 한도 끝도 없었다. 그 쑥으로 어머니는 국을 끓이시기도 하고 백설기 같은 떡을 만드시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쑥떡은 나의 인생 음식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제일 즐겨 먹고 좋아했던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폭삭폭삭하고 그리 달지도 않으면서 은은한 단맛이 있고 쑥의 향기가 은근히 배어 있어 먹고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어떤 날은 쑥떡을 너무 먹어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교에 가야 했고 집에 와서 숙제를 한 후 아이들하고 놀러 다니느라 어머니와 함께 뒷산에 가서 나물 캐는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봄이면 항상 쑥떡을 해주시곤 하셨다. 


  이제는 어머니와 함께 주변에서 나물을 캘 수도 없고 그것으로 음식이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쑥떡을 만들 수도 없다. 어머니와 함께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그것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때가 가끔씩 생각이 난다. 특히 쑥떡은 내 마음에 너무도 깊게 남아 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 시절로 가고만 싶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작가의 이전글 길 아닌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