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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r 27. 2022

허무의 끝

 만다라는 불교에서 쉽게 말해 깨달음의 경지를 뜻한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는 법운과 지산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가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고, 자신이 원하는 삶이 진정 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의 끝으로 가고 싶다. 고독의 끝, 번뇌의 끝, 허무의 끝. 만날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끝에서 모든 것의 처음을. 그리고 또 이길 것이며 삼킬 것이라고 했다. 고독과 번뇌와 욕망과 절망과 허무와 그리고 나를 삼키고 너를 삼키고 삼계를 삼켜서 드디어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이 하늘을 비상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허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허무의 실체를 규명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허무는 자기에게 있어 바로 삶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삶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불타에게도 불가사의한 존재가 삶이요. 허무라고 했다.”


  삶은 어쩌면 허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동안의 삶에서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보람과 성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닿는 곳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술을 마셨습니다. 담배를 피웠습니다. 어육을 먹고 여자를 찾았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나는 또 허무를 잊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여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발작처럼 가부좌를 틀고 화두와 씨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절망, 절망, 나는 또 독한 막소주를 바리때로 퍼마시며 진저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끝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 끝의 끝에 서보고 싶었습니다.”


  법운은 정통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의 길을 걸어간 반면, 지산은 파계승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까지 경험하며 깨달음을 알고자 했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으나 목적은 같았다. 누구의 길이 옳은 것일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옳은 길은 있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눈 속으로 삽자루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밀었다. 그때 뭉툭하고 무엇이 삽 끝에 걸렸다. 나는 삽을 빼고, 손으로 눈을 헤쳐 보았다. 거기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승복의 사내가 언덕을 오르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는데, 지산이었다. 그의 등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바랑이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고개를 받쳐 들고 얼굴에 묻어 있는 눈을 털어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자기의 눈에 점안을 했는지 못했는지 나로서는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던 지산,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결국 그가 걸어가고자 했던 그 길의 끝에 서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허무의 끝을 찾아 그 오랜 세월 고행했건만,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허무의 끝은 진정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있다면 존재 그 자체의 없음인 것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 것일까? 인간은 정녕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인가? 그 깨달음의 끝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 모든 것이 허사라면 그동안의 삶의 발자취는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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