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온 시간들 Apr 11. 2022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

나는 오늘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을 하겠지만,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헛된 에너지를 쓰며 오늘 하루를 또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오늘 내가 하는 일들이 고작 먼지 정도나 일으키는 그러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선불교는 모든 인간이 부처님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불성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성품, 즉 부처님의 순수한 마음이다. 번뇌로 더럽혀진 중생의 마음도 본래는 부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이론이다. 누구든지 본래의 마음을 깨닫고 실천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선불교의 핵심이다. 따라서 불성은 곧 인간의 참마음이며 또한 본래의 성품이다. 


  중국의 종밀(宗密, 780~841)은 ‘지(知)’의 개념을 불성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달마가 중국에 온 후 부처님의 마음이 혜능(638~713)까지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고, 각자가 알아서 수행을 하며 불성을 직접 체험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타락하고 약해지면서 불성이라는 비밀스러운 진리가 위기에 처해지자,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 선사는 불성의 핵심을 지(知)라는 한 글자로 밝혀주었다. 


  고려시대 지눌은 신화와 종밀의 이론에 따라 불성 또는 진심을 ‘공적영지지심(空寂靈知之心)’이라고 불렀다. 즉, 중생의 본래의 마음인 진심은 일체의 번뇌와 생각이 없는 고요한(공적,空寂) 마음이고, 동시에 신묘한 앎(영지, 靈知) 내지 순수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적과 지는 불교의 전통적인 용어로는 정(定)과 혜(慧)이고, 선에서는 정과 혜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라고 말한다. 


  종밀은 공적영지지심을 깨끗하고 투명한 구슬로 비유했다. 구슬이 흠 없이 맑고 투명해서 주위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듯이, 진심은 일체의 번뇌가 없는 비고 깨끗한 마음이며, 만물을 비출 수 있는 투명한 구슬같이 앎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오감을 가지고 거의 대부분을 판단한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며, 그것으로 모든 것의 판단의 전부로 삼는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으로 대상을 분별하며, 옳고 그름을 따질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더욱 근본적인 바탕이나 원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로 인해 우리 마음의 진심을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효대사는 마음의 원천에 대해 외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뭇 생명 있는 자들의 감각적 심리적 기관은 본래 하나인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것들은 그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부산한 먼지를 피우기에 이르렀다.” 


  내가 하는 오늘의 모든 일들이 겨우 부산한 먼지를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일까? 그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을 알아가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지눌 대사에게 자신의 성품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묻자 지눌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단지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이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사용해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이 없다고 하면서 눈을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어떻게 보겠는가? 만약 눈을 잃은 것이 아님을 알면 즉시 눈을 보는 것이 되어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신령한 앎(영지) 역시 이와 같다.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무엇을 다시 알기를 구하겠는가? 만약 알기를 구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아라. 단지 알 수 없음을 알면 그것이 곧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중에는 ‘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생각들은 사실 나라는 생각 이후에 일어난다. 어쩌면 나의 마음에서 처음에 일어나는 ‘나’라는 생각은 거짓된 나의 모습일지 모른다. 이러한 거짓된 나를 제거한 후 우리는 참나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한 참나는 결코 부산한 먼지를 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혼의 감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