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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Apr 16. 2022

내 안의 불꽃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 마음속에는 절대적으로 자리 잡은 어떤 존재가 있다. 그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되고, 나의 목표가 세워지며, 매일 살아가는 나의 삶이 그로 인해 좌우되기도 하고, 나의 인생의 길이 그로 인해 결정되기도 한다. 


  정미경의 <밤이여, 나뉘어라>는 나의 마음속에 불꽃같던 그 존재가 삶의 여정에서 허물어졌을 때 그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강의 저쪽에서 끊임없이 질주하며 나를 유혹하던 s의 등,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휴가를 반납할 수 있었고, 바닷물에 몸 한 번 담그지 않고 청춘을 보냈으며, 주전자 가득 커피를 끓여놓고 밤을 샐 수 있었는데, 비굴과 모멸을 비타민처럼 기꺼이 받아 삼켰는데. 어쩌면 나의 지난 생은 너의 삶의 그림자였다. 나는 너를 따라잡고 싶었고 겹쳐지고 싶었고 한 번만이라도 너를 밟고 지나가 보고 싶었다. 모든 걸 잃은 건 P가 아니라 나인 것처럼, 그가 일순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무의미한 것들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짓밟힌 모래집처럼, 나는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주인공에게 있어 P란 존재는 그에게 있어 어릴 때부터 절대적인 존재였다. 비록 친구이긴 했지만, 단순히 친구라는 것을 넘어선 자기 삶의 푯대 같은 존재였다.


  “알잖아. 누가 저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겠어. 어제, 들어오기 전에 저 사람 술 사 왔지? 밤에, 미친 여자처럼 온 집을 뒤졌어. 어디다 숨겼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 저이는 감추고 나는 찾아서 버리는 건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전쟁이야. 병원에서 근무할 땐 특수 제작한 점퍼를 입고 양쪽에 휴대용 술병을 꽂아놓고 마시기도 했어. 나 몰래 술을 사 와서는 정원 여기저기에 묻어놓고 스트로를 꽂아놓고 마시기도 해. 나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개처럼 땅바닥에 엎드려서, 얼굴을 흙바닥에 박고는 술을 빨고 있는 걸 커튼 틈으로 보고 있으며,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저건 더 나빠. 이미 미안하단 생각도, 죄책감도 없어.”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머나먼 이국땅인 오슬로에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불꽃같았던 P는 그의 삶을 너무 불살랐는지 허약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몽상에 빠진, 현실을 부정하는, 헛된 꿈을 좇아 헤매는 예전의 완벽한 존재가 아닌 그저 삶을 술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허망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었다.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 백야가 계속되는 동안은, 덧창 없이는 잠들 수가 없어. 밤이 없으면, 잠들지 않고 일하면 썩 훌륭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 저 사람에겐, 자기 인생이 끝없는 하얀 밤처럼 느껴지나 봐. 기억과 욕망이란, 신의 영역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선택했겠지. 저 사람은, 그림자를 찾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


  너무나 아름다운 백야지만, 차라리 어두운 밤의 존재가 더 의미 있는지도 모른다. P는 북유럽의 백야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에 P는 무릎을 꿇었고, 그저 백야라는 아름다운 밤의 몽환적 상태의 삶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며 알코올 중독자로서 평범한 일상생활도 해나가지 못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슬로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P는, 내 안의 불꽃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나 역시 불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사그라지고 말 것을 나는 알고 있다. P를 모른다 한 것은, P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잠은 우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일어나 나무 덧창을 연다. 나무들은 정령처럼 그림자가 없다. 밤을 끝내 어두워지지 않는다. 나도 저 투명한 밤이 두렵다. 하얀 밤이여, 나뉘어라. 슬픔도 아닌 것이, 회한도 아닌 것이, 물이 되어 내 눈에서 밀려 나온다. 밤은 그제야 출렁이듯 왜곡되며, 둥글게 소용돌이친다. 밤의 하얀 폭이 세로로 쪼개지며, 그 틈으로 검붉게 질퍽이는 덩어리들이 뭉클뭉클 밀려 나온다. 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귀를 감싸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P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고.”


  주인공은 P처럼 되기 위해, 그를 바라보며, 삶의 롤모델로 삼아 살아왔건만, 이제는 내면의 불꽃같은 존재였던 P를 잃어버렸다는 허망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소중한 불꽃같은 존재가 영원하기를 바랐건만, 사그라져 버린 그 불꽃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다시 피워 올릴 수도 없건만, 이제 내면에는 어떠한 것을 채워서 살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현재의 사실을 잊고 그저 과거의 그 화려한 불꽃을 간직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불꽃같은 그 존재의 허망한 모습에 자신의 삶도 허물어져 가는 것 같고, 다시는 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그 불꽃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차라리 P에게는 백야가 나뉘어 어두운 밤의 존재가 있는 삶이 더 의미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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