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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Apr 16. 2022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살아가야 하는 이유, 삶의 목적, 존재의 의미를 어딘가에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무엇을 부여잡고 살아가야 할까?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고,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찾아오는 상실감은 우리의 인생을 허물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상실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질수록 더 이상 존재하고자 하는 바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도 찾을 수 없기에 삶의 어디까지 추락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바로 인생의 상실감이 삶의 전체를 흡수해 버릴 때 우리의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질해 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오키나와는 웃으며 바늘을 빼낸다. 살갗이 떨리면서 바늘이 빠져나오는 순간, 헤로인이 손가락 끝까지 돌아 둔한 충격이 심장까지 전해져 왔다. 눈앞에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오키나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슴을 누르고 일어섰다. 숨을 쉬고 싶은데 호흡의 리듬이 바뀌어 잘되지 않는다.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고 입 속이 타는 것처럼 마른다. 레이코가 내 오른쪽 어깨를 안듯이 붙잡아 준다. 바싹 마른 잇몸에서 겨우 배어 나온 침을 조금 삼켰더니, 구역질이 발끝부터 치솟아 오르듯 울컥울컥 올라와서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로 쓰러졌다.”


  인생의 상실감으로 내면이 채워진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삶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인생은 그저 끌려가는 대로, 아무 목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하루를 지극히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류, 나를 죽여줘. 왠지 이상해. 차라리 그냥 나를 죽여 줘. 눈물이 가득 고인 릴 리가 외친다. 우리는 내동댕이쳐졌다. 철조망에 몸을 부딪쳐 본다. 철조망에 붙은 뾰족한 바늘이 어깻죽지 살을 찌른다. 나는 내 몸에 구멍을 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오로지 중유 냄새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생각에만 계속 빠져 있다 보니, 주위에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땅바닥을 기면서 릴리가 나를 부른다. 다리는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온통 빨간 알몸으로 땅에 널브러져 계속 자기를 죽여 달라고 외치고 있다. 나는 릴리에게 다가갔다. 릴리는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 울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삶에서의 그들이 살아가야 할 이유나 의지 목표 같은 그 무언가가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오늘을 그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것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맡기고 살아갈 뿐이었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할지 모른다. 그것이 비겁하고 비굴한 자의 변명일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삶도 죽음도 별 차이가 없었다. 


  상실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내팽개칠 수 있고, 삶에 대해 어떤 인식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도 살아가야 할 이유도 상실감이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에게 있어서 상실감은 누구의 책임인 것일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가 안겨주는 허무의 삶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운명이라는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삶의 굴레에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실감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필연을 자신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사람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오로지 각자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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